9월 6일
내일은 승객들 결제내역서를 뽑는 날이다. 다시 말하면 ‘나만’ 제일 바쁜 날이다. 그래도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좋은 날이다. 처음 결제내역서를 뽑던 날이 생각 난다. 우리 회사(라 쓰고 이놈의 회사라 읽는다)는 프로그램이 90프로 이상 다 일본어로 되어 있다. 나같이 일본어 1도 못하는 사람은 프로그램 클릭 하나하나 하는 것에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 일인지. 더구나 나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업무가 바로 손님들의 결제내역을 닫고, 결제 내역서를 출력하는 일. 결제 내역을 닫을 때는 각 데크 별로 (크루즈에서는 층을 데크라고 부른다) 닫는 것이 가능하나 클릭하나 잘못해서 취소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한 명 한 명 일일이 다 취소해야 한다. 다행이 이제까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래서 뿌듯하기도 하고. 하하. 오전 9시경 시작되는 이 작업은 1-2시나 되야 끝이 나고, 이 결제 내역서는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일일이 접어서 객실로 배달해야 한다. 객실로의 배달은 하우스키핑에서 해 주지만, 접는 것까지 마치면 5시쯤 되던가. 신용카드 결제불가 승객이 분명 있기 때문에 회계부에서 이 결과가 나오기 까지 또 기다리고. 하루가 다 소요되는 일. 처음 이 일을 하던 날,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클릭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데이터 양이 너무 많이 느린 프로그램이 시작 하자 마자 멈춰 멘붕. 이메일 창 한 번 클릭했을 뿐인데 바로 멈춰 버렸다. 그래도 어찌 어찌 무사히 일을 마쳤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몸이 녹초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냥 그 기억은 아찔하다. 그 뒤의 결제내역서 뽑는 건 쉽사리 하게 되었다는 후문…. 자랑스러.. 히히. 이번 크루즈에서는 처음이라 약간의 긴장은 되지만 내일 일이니까 내일 고민 하기로 한다.
지난 밤새 어찌나 배가 흔들리던지 긴급대피경보음이 울리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얇을 수도 있으니 바지 몇 개와 티셔츠 몇 개를 껴입고,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겠어! 하는 계획을 세우며 잠이 들었다.
오늘의 일과도 어제와 다름 없는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시간 가는 것이 지루할 만큼. 괜히 옆 부서 일 자청해서 좀 도와주고 했네. 쉬는 시간에 잠을 좀 자려고 했는데 #셜록홈즈 와 #히든피겨스 를 다시 보느라 그러지 못했다. 내 사랑 셜록홈즈. ㅠㅠ 지루한 일과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7시 40분쯤 해서 끝이 났다. 대박. 매일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네.
엊그제 파티를 할 때 인도네시아 친구 하나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 말하길래 가르쳐 주기로 했다. 다들 말로만 배우고 싶다 하지 막상 가르쳐 달라고는 이야기 안 하는데 이 친구 관심이 대단하다. 런닝맨 팬이라서 그런가 보다.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사람을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조금 했지만, 오늘 이야기 나눠보고 필요한 거 가르쳐 주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 말이 다른 한 명이 더 온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 듣던 또다른 친구가 자기도 시간 되면 온다 한다. 허허. 일이 커지는 걸. 그렇게 약속한 9시가 되고, 크루 메스로 가서 기다리니. 헐. 진짜 3명이나 왔다. 그리고 잠깐 너네 뭐해? 하고 물어보던 나의 치프도 유니폼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 이렇게 4명을 앉혀 놓고 생전 해보지도 않은 한국어 완전 기초 반 수업을 진행했다. 갑자기 든 생각이 이름을 한국어로 써 주면 좋아하겠다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다! 와우. 조선주. 똑똑해. 아주 칭찬해! 혼자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ㅋㅋㅋ 친구들 이름을 한국어로 써 주고, 이에 맞는 알파벳과 대응하는 자음 모음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아무래도 자기 이름이니까 빨리 기억하는 듯 했다. 그러고 싶어 했고. 이름 써 보고. 성도 써보고(성이 한국같이 한 글자 아니라서 공부하기 좋음). 쉬운 단어 하나씩 읽어주며 써보라고 했다. 머리. 라디오. 티비. 하이트(우리 크루바에서 파는 맥주가 한국 맥주 하이트 이므로). 주세요. 내이름 써니도 가르쳐 주고. 고마워요. 크루. 크루오피스. 등등 받침 없는 단어를 골라서 계속 읽어주고, 써보게 했다. 생전 모르던 글씨를 자기가 쓸 줄 알게 되는 게 즐거운가 보다. 즐거움이 지속되는 듯 하면 약간 어려운 듯 한 것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흥미를 잃지 않겠지. 라고 혼자 무슨 이론 인 마냥 생각해본다. 맛보기로 받침 있는 실생활 단어 몇 개. 가령 맥주 같은? 그러다가는 맥주 주세요. 하이트 맥주 주세요. 이렇게 응용도 해 가면서. 다들 즐거워해주고, 잘 따라와주고 해서 얼마나 기쁜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각자의 종이 한 장 가득 삐뚤빼뚤 이지만 가득 채운 한국어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수업료는 하이트 맥주 한 캔. 사실 맥주 마시며 가르침 ㅋㅋㅋ 이제 항해하는 바다 위 저녁 먹고 1시간이지만 할 일이 생김. 개인적으로도 이 경험을 잘 기록해서, 한국가서 쓸 수 있도록 해야 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누가 프로 계획러 아니랄까봐) 배 위에 있지만 외국인에게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고민을 계속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나도 파이팅! 새로운 내 외국인 학생들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