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 일기

9월 7일

by 꿈꾸는 앵두

‘나만 바쁜 날’ 이라 정말 나만 바빴다. 아침부터 결제내역서와 청구서를 몇시간에 걸쳐 출력하고, 확인을 하고, 접어서 테이프까지 다 붙이니 어느덧 3시 반. 그나마 나의 손이 이러한 단순 노동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끝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노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외주를 주기도 했다.. ㅋㅋ 뭐 자랑은 아니지만, 내 손은 참 쓸데없이 빨라….;;; 강조;ㅋㅋ 아침부터 컴퓨터만 뚫어져라 보고, 단순 노동 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더니 피곤해서 2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결제날에는 항상 사진 찍는 업무를 잘 잊어버리곤 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데크 10 전방에 스위트 객실 손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야외갑판이 있다. 데크 11은 유리로 막아져 있어서 시야는 보이지만 조금 답답한 느낌. 데크 9에는 브릿지(조타실)가 있지만 출입 하기는 어렵지. 그러므로 데크 10 전방 야외갑판은 최고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이 곳에서 매일 같은 시각 정면, 좌, 우 이렇게 세 장의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들은 도쿄 본사로 보내지고,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사진도 찍고 싶지만 바람이 워낙 불어 찍으나 마나 이다. 서 있기 조차 힘든 날도 있다. 내가 가벼워서가 절대 아니라 바람이 세서….. 사진을 찍는 것은 중요한 업무인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거의 유일하게 하루 중 바깥 공기를 타의로 쐴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데크 5의 리셉션은 창문이 없다. 천장에 달린 티비로 배가 항해 중임을 알 수 있다. 테크 10에 cctv 가 한 대 있는데, 이렇게 항해하는 모습이 티비 채널 하나로 고정이 되어 24시간 방송된다. 그래서 해가 지는지, 어떤 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부러 8층 이상의 오픈 데크까지 가지 않는 이상은 바람 쐴 시간도, 햇볕을 받을 시간도 없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게을러서 그런 거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다는 뜻이다. 캐빈. 사무실. 캐빈. 메스. 크루바. 이렇게 짧은 동선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 시간이 내게는 햇볕 쬐는 유일한 시간일 수 밖에. 일본을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기온차가 심해 아침에는 무척 추워졌기 때문에 긴 팔을 입고 잤다. 그래도 조금 서늘한 느낌이었는데, 어제 오늘 해서 날씨가 180도는 바뀐 느낌이다. 오늘의 데크 10 전방 갑판의 바람은 후텁지근한 바람이다. 얼른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저 멀리 우리 배를 가이드 해 주는 보디가드 배가 한 척 보인다. 괜히 든든하다. #캡틴필립스 의 영화 내용이 재연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기도 하다. 비상시에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 없다. 이미 승객들과 함께 해적대책 비상훈련도 했고, 우리 승무원들도 준비되어 있다. 이 지역을 지나면 캡틴필립스를 한 번 더 봐야지 생각했다.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여담이지만 승무원이 되고 다시 보니 새로운 영화들이 있다. #타이타닉 #캡틴필립스.. 흠.. 두개 밖에 없나? 예전에 호텔에서 비서일 할 때는 #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 보고 울 뻔. 하하.

낮잠을 자고 돌아온 후에는 하루 종일 결제내역서 청구서 때문에 하지 못한 정말 나의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초 집중하고 겁네 열라 일을 하면 식은죽 먹기이다. 사실은 내가 일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리셉션 정산을 마치면 보통 끝마치는데 오늘은 정산에 조금 문제가 생긴 모양인지 조금 늦게 끝이 났다. 더구나 내일 이틀 간의 현금 결제일을 맞이하여 대부분의 리셉셔니스트들이 처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프가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하느라 조금은 늦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초스피드 저녁식사를 마치고 캐빈으로 돌아와 씻었다. 콜롬보에서 아보카도(나는 아보카도 광이다….)를 사 온 것이 있는데, 며칠 전 혹시나 하고 잘랐다가 여전히 돌덩이 같길래 잘린 채로 두었다. 만져 보니 말랑해 진 것이 먹을 때가 되었다. 분쇄기 같은 건 없으니 수작업을 하기로 한다. 컵에 아보카도를 담고 손으로 으깨기 시작했다. 난 덩어리 진 것이 좋아 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잘 으깨지지 않았으므로. 메스에서 얼음을 담아와서 넣고 주스를 만들었다. 수제 아보카도 주스. 맛은 생각보다 별로 였지만 내가 만든 것이니 맛있다 맛있다 주문을 걸면서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런 건 남이 만들어주는게, 돈 주고 사 먹는 게 맛있군 생각을 해 보았다.

지리를 잘 모르지만 아프리카 위에 신발 모양 반도가 있다. 그 신발 엄지발가락과 위에 땅이 맞닿을랑 말랑 한 곳을 내일 지나게 된다. 무사히 수에즈 운하까지 어서 닿기를. 그나저나 캐빈 넘 더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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