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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앵두 Oct 06. 2017

크루즈 승무원 일기

10월 5일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많이 배가 흔들렸다. 오전 미팅 때 저녁때까지 점점 더 심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헐. 이것보다 더 심해지면 어떤 거지? 예전에 한 번 유투브에 크루즈 흔들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집채 만한 파도를 뚫고 항해하는 바깥 모습도 보았고, 실내 CCTV는 크루는 기둥에 몸을 피해 있고, 온갖 고정되어 있지 않은 기구들이(소파, 책상 등등 모두) 오른쪽으로 쏠렸다가, 왼쪽으로 쏠렸다가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서 보세요. 자연의 힘에 대한 놀라움을 보실 수도 있어요.)

배가 양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바퀴 달린 내 의자는 무거운 내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잡기가 어려웠다. 앞뒤로 왔다 갔다, 겨우 책상을 붙들어야 할 정도. 그러다 잠시 일어나 일을 보는 순간 큰 흔들림이 있었나 보다. 두 개의 의자들이 동시에 제멋대로 움직였고, 저쪽 모니터가 미끄러지며 움직였다. 책상 위의 가벼운 물건들은 다 쏟아졌다. 바깥 로비에서는 쿵 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팜플렛 전시를 위해 세워놓은 스탠드가 로비에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보았는데, 유튜브 영상이 생각이 나면서 이렇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보통 나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나머지 인원들은 쉬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이 돌아 오면내가 쉬는 시간을 갖는 식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박스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내 의자 포함하여 의자를 책상에 붙였다. 서랍을 열 수 없도록 붙였다. 모든 책장의 물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막았다. 모니터와 키보드를 테이프로 붙였다. 옆 방에 액자들도 흔들거리는 것들도 다 테이프. 냉장고 문, 물병들, 떨어지기 쉬운 것들은 바닥에 다 놓고, 책상에 있는 파일들은 다 눕혀 놓았다.

그렇게 바쁘게 안전 장치를 하고 있는데, 당연히 승객 캐빈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리셉셔니스트들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테크니션들도 바쁘고. 바쁘고 바쁘다. 다행히도 큰 사고는 없었다. 천만다행이다. 어제에 이어 걷는 것 조차 힘든 오늘. 오늘은 승객용, 크루용 하나씩 운행하던 엘리베이터도 안전상의 이유로 전면 중지되었다. 캐빈에 돌아오니 화장실 싱크대 판넬이 떡 하니 열려 있다. 그래도 캐빈 내에 크게 깨지거나 한 거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오로라 이야기.

어제 야외갑판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으므로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오늘은 데크 7,8,9의 후방만 우선 개방하고, 데크 10,11의 전방은 추후 안내한다는 안내방송을 했었다. 저녁을 먹고, 캐빈에 와서 Phantom Man 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몸이 아픈 주인공 Leo 가 환영이 되어 다리 다친 경찰 Alex 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인데, 느낌이 참 좋은 영화였다. 따뜻한.

영화를 다 보고 이제 뭘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전방 개방에 대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잠시 후 오로라 출현에 대한 방송이 나오는 것이다! 바람같이 옷을 갈아입고, 전방으로 가보았다. 저 멀리 오로라라고 불리는(먼저 있던 승객들이 알려준) 것이 보일랑 말랑 했다. 연두색 빛으로 이것이 오로라인지 구름 사이에 보이는 하늘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옅은 오로라였다. 그렇게 계속 옅은 오로라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색이 점점 진해지더니 모양이 이리저리 바뀌고, 무지개빛으로도 변했다. 잠시지만 빛도 내었다. 그리곤 다시 점점 옅어졌다. 순간이었다. 순간. 내가 예상하고, 티비에서 보던 오로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내가 보았다. 으흐흐.

크루 전용 전방 데크로 갔는데, 또다시 안내방송이 나왔다. 전방에 오로라가 출현했다고 했다. 응? 나 여기 전방에 있는데? 오로라 어디 숨었니? 저 멀리 옅게, 더 옅은 오로라가 있었다.(고 믿는다) 이 오로라는 계속 옅은 색을 띠다가 서서히 연두빛으로 바뀌는 도중에 바뀜을 그만 두고, 거꾸로 옅은 색으로 바뀌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기다렸는데, 어제 보름이라 그런가 밝은 달이 구름들과 함께 있는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웠고 ㅋㅋ 추우니 캐빈으로 돌아가서 다음 방송을 기다리자 싶어 돌아왔다. 내 캐빈에 승객 캐빈 전용으로 하는 방송이 속삭이듯이 들리니 잠결에라도 들으면 나가서 보고 와야지 싶다. 언제까지 저 밖에서 기다릴 순 없으니…

배가 많이 움직이는 만큼 내 몸도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피곤하다. 잠이 온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합당한 핑계를 대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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