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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앵두 Oct 12. 2017

크루즈 승무원 일기

10월 11일

일요일에 뉴욕 도착이니 한 참을 더 가야 한다. 어제는 앞뒤로 배가 흔들렸는데 오늘은 양 옆으로 흔들린다. 이래나 저래나 신경이 곤두서면서 몸이 힘든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일하는데 화가 좀 났고, 화를 냈다. 그래서 마음이 좋질 않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겠지 하며 넘기려 해도 그게 되지 않았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똑 같은 상황을 매일 앵무새처럼 설명해주는 것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가장 쉬운 방법인 생각없이 물어보고 답을 얻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듯 하여 화가 났다. 예전엔 어떻게 했지 생각을 하고, 기록들 안에서 찾아보려는 시도. 혹은 틀렸더라도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이유 있는 실수를 해 보는 것. 이게 중요한 게 아닐까. 처음 있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래도 똑 같은 상황들에는 좀 알아서 하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다; 우리 크루즈 시작한지도 두 달이 다 되어가잖아. 얘들아! ㅠㅠ 처음 있는 상황들을 내게 설명을 하면, 나는 물어본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고. 최소한 바로 답을 얻는 게 아니라, 한 번 쯤은 생각하게 해 주고 싶은 내 욕심은 지나친 것일까….

지금 당장 안되는 것을 안된다고 내부 사정에 의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해주었는데, 곧 다시 와서는 떼쓰듯 손님 핑계를 대는 것도 화가 난다. 손님에게 지금 당장 안되는 것에 대한 사과와 유감을 표시하고, 잘 설명하고 이야기해서 이해시키고, 당장 요청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당신의 요청사항을 케어하고 있다 라는 생각이 들도록 팔로업 잘 하는 것이 리셉션 프론트의 역할이 아닐까. 손님이 원하니 당장 내놔라 라는 식의 태도는 너가 동료로서 나와 협동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뭐하자는 거니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굳이 내 쉬는 시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려(2시간이나 기다려) 내게 캐빈 요청사항을 전달하는 것도 화가 난다. 오늘은 캐빈 기술적인 문제, 지난 번엔 타월 한 장 캐빈에 전달하는 걸 못해서 기다린다. 나를. 내게 일을 줘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캐빈의 기술적인 문제의 경우 2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더구나 문제가 있는 캐빈의 승객들은 이 문제가 가능한 빨리 해결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2시간이나 나를 기다린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테크니션들은 문제를 봐야 해결을 할 수 있다. 내가 캐빈에 갔을 때 생겼던 문제(누수)는 이미 흔적이 없어졌고, 테크니션 입장에서는 이 캐빈은 문제가 없는 캐빈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고, 이를 승객이 리셉션에 보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을 위해서는 또다시 문제가 다시 생길 때 보고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승객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는지. 그리고 특히 누수 같은 문제는 더 큰 누수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크건 작건 1순위 보고 이다. 바로 테크니션이 가서 누수 지점을 찾았어야 했는데. 근데 이걸 2시간이나 기다렸으니.

하긴 예전에 승객이 “하우스키퍼가 내가 사 놓은 기념품을 버렸다” 라는 내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지만(하우스키퍼들은 아무리 쓰레기 같아 보여도 휴지통 밖에 있는 물건은 손도 대지 않는다) 상황 자체는 엄청 예민한 보고를 했는데, 담당했던 이는 메모에 “승객이 이같이 보고 했는데, 써니가 지금 점심시간이니 그 이후에 써니에게 보고 하겠음” 이라고 써 놓아서 기절초풍한 적도 있었다. 고맙다. 내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지 몰랐어….. 내가 없으면 리셉션이 안 돌아가는 구나… -_-

나 심심할 까봐, 일기에 쓸 거리 없을 까봐 매일 매일 다이나믹한 하루하루를 만들어 주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어차피 화를 내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내 손해니까 훌훌 털어버리고(그럴 수만 있다면ㅋㅋㅋ) 내일을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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