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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진영 8주기, 주옥같은 영화 5편

영화 '국화꽃 향기'처럼 살다간 명배우로 기억돼

매년 9월이 시작되면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故 장진영 2001년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피판레이디에 선정될 만큼 개성 넘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영화배우로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고 5편의 출연작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인은 지난 2008년 위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 1년째인 2009년 9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달리했다. 영화팬들은 매년 4월 1일 만우절에 장국영을 추모하듯, 9월 1일이 되면 장진영을 기억할 것이다.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오가면서 배우로서 아우라를 각인시킨 장진영은 자신의 출연작 <국화꽃 향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운명을 연상시키며 영화처럼 극적으로 살다가 갔다.


장진영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2008년에 전해졌고 9월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아 투병을 시작하면서 이듬해 7월 미국에 요양을 떠나기도 했으나 병세가 악화됐다. 배우자인 김영균씨와  2009년 7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달리해 팬들과 연예계에 충격과 깊은 슬픔을 안겼다.


팬클럽 공식 행사에 참석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생전의 배우 장진영 / 시크푸치

1993년 미스코리아 충남 진으로 선발돼 미녀 스타로 연예 활동을 시작한 고인은 1997년 드라마 <내 안의 천사>를 통해 연기자로 발돋움했고, 1999년 영화 <자귀모>로 스크린에 데뷔해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반칙왕>(2000년)에서 주인공을 꿰차며 충무로 은막에 입성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9편의 영화나 6편의 드라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때론 털털하고 보이시한 매력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팬심을 끌어모으며 루비라는 애칭과 함께 카카오 다음의 'JROSE'라는 공식 팬클럽 행사에도 참석하며 친절한 여배우의 전형이 됐다.
 

김영균 씨는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에세이를 발간해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부친인 장길남 씨는 고인의 모교인 전북대학교에 장학금 1억 원을 기탁하고 계암장학회를 설립, 학생들을 후원하고 있다.

 

함께 출연하는 파트너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가 하면, 여성 캐릭터가 부재했던 당시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연기파 배우로도 손꼽혔다. 드라마 <순풍 산부인과> 출연 후 9년 만에 컴백한 드라마 <로비스트>(2007년)는 유작이 됐다.


 

영화 '국화꽃 향기'


성시경이 부른 '희재'라는 메인 테마로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국화꽃 향기>(2003)는 밀레니엄 청춘 세대의 순수하고 소박한 사랑을 극적으로 살다간 그의 인생처럼 다가온다.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 노래를 듣고 공감하던 아날로그 감성으로 지난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는 이 영화에서 장진영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 서인하(박해일 분)와 이별 후 재회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민희재 역을 맡았다.


영화 초반, 장진영은 선머슴 같은 보이시한 매력으로 동아리에 갓 들어온 새내기 인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최근 개봉한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영화 <내일의 안녕> 속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슬픔을 간직한 캐릭터로 인하와 아이를 남겨 둔 채 떠나야 하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태어날 아기에게 남겨줄 한지 그림책을 만들며 암세포가 주는 고통과 싸워 나간다.
 

영화 '소름'


윤종찬 감독이 연출한 영화 <소름>(2001년)은 지난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함께하는 다시 보기' 프로그램에서 감독과 배우가 참석하는 GV로 관람했는데,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이자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자 선영 역으로 변신한 장진영은 이 작품을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IMF 이후 부동산 개발 광풍을 몰고 온 아파트의 묵시록이라 해야 할까, 재개발로 철거가 결정된 복도식 아파트를 배경으로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하거나 버림받는 기구한 인간사의 비극을 목도하게 한다.

 

장진영은 "영화의 내용도 처절했지만, 배우에게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디렉션도 정말 처절했다"라며 "극 중 클라이맥스인 선영이 연못가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서는 끊지 않고 롱테이크로 오래 가져가서 어느 순간 감정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가 한편으로 근육이 이완되는 것 같아 잊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도시 남녀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권칠인 감독의 영화 <싱글즈>(2003년)에서 장진영은 서른 즈음에 이별 통보를 받고 원형 탈모가 생기고 직장에서도 힘들어하는 디자이너 나난 역을 맡았다.


영화 '싱글즈'


영화 <싱글즈>는 2003년 장진영 팬클럽 JROSE를 초청한 특별 시사회에서 보게 됐는데,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미혼모와 낙태 문제를 조명하는 스물아홉 살의 거침없는 솔로 예찬처럼 다가왔고 당시 여성 캐릭터가 부재한 한국영화에서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 같다고 했던 것 같다.
 

장진영은 통통 튀면서 가장 밝고 사랑스러운 캐릭터 나난을 통해 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의 오드리 도투를 연상시키는 바람머리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엄정화와 두 톱으로 나선 이 작품으로 장진영은 두 번째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이 영화는 장진영의 필모그래피 중 대표작으로 2030 세대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장 많은 관객수(220만 명)를 기록, 흥행에도 성공하며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장진영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가장 많은 안긴 것으로 보이는 영화 <청연>(2005년)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여성 영화인 데다가 윤종찬 감독과 두 번째 만남으로 화제가 됐지만, 실제 주인공인 박경원의 친일 행각 논란에 휘말리면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한 채 내려지는 저주받은 걸작이 됐다.


영화 '청연'


영화 <청연>은 비행사가 되고픈 일제 강점기 여자의 꿈과 현실의 대립을 감정의 과잉 없이 잘 그려냈다. 전작 <소름>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윤종찬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 이 영화는 <싱글즈> 이후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해 원톱으로 했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처연함과 보이시한 박경원의 면모를 보이며 열연했다.
 

특히, 요인 암살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장면은 영화 <소름>에서 남편에게 학대받았던 인상적인 장면을 복기하게 만든다.

 

장진영은 영화 <청연>에 대해 "개봉 때 그런 일이 생겨 화병이 났다. 이렇게 끝날 순 없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았고 친구들도 안 만나고 외부 접촉을 끊고 집에 있었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


영화로는 유작이 된 김해곤 감독의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참)에서 장진영은 거칠면서도 한 남자에게 순정을 다 바치는 룸살롱 아가씨 연아로 변신해 당시 개최된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영화는 애인 있는 남자에게 장난처럼 연애를 걸며 사랑하게 되면서 두 남녀 사이의 티격태격 육탄전과 욕설 등 연애담이 경쾌하게 전개되지만, 두 남녀의 이별을 예고하고 가슴 아픈 참회의 눈물까지 끌어내며 신파조로 다소 무겁게 결말을 맺는다.
 

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연애의 가벼움을 못 견디며 자신의 전부였던 영운(김승우 분)이 떠난 후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듯 소주병을 손에 쥔 채 지쳐 쓰러져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영운에게 일방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하는 연아를 지켜보며 가슴 아팠다. <소름><청연>을 잇는 장진영의 여성 캐릭터 3부작이라 할 만하다.


유쾌한 영화 <싱글즈>를 제외하곤 여배우가 소화하기엔 어느 하나 쉬운 작품이 없었던 캐릭터를 연기하고 견뎌내면서 병마와 싸웠을 장진영은 한국 영화사에서 배우로서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9월이면 그의 출연작을 다시 관람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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