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동심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부끄러움 성찰

영화 '나를 구하지 마세요'




다소 충격적인 결말에 보고 난 후에도 그 여운이 오래가시지 않는 독립영화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극 중 빚더미에 못 이겨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본 소녀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시작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2016년 9월 낙동강 하류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모자의 사건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사건 직후 집에서 발견된 아이가 남긴 메모는 이 작품에서 아빠의 유품으로 남겨진 다이어리에 소녀가 시를 읊조리듯이  써 내려간 구절로 제목에 사용됐어요.


나를 구하지 마세요 숨이 막히더라도
나를 구하지 마세요 발버둥 치더라도..



올해 비대면 방식으로 개최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본선에 진출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작품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모녀의 이야기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비추는 영화로,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 때로는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라고 심사위원으로부터 평가받았습니다.

또한 작품을 연출한 정연경 감독은 아이의 시선에서 사회상을 조명한 단편영화 <바다를 건너 온 엄마>에 이어 다시금 장편 데뷔작 <나를 구하지 마세요>에서 슬프고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며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합니다.

감독은 "자신에게 다가올 결과를 알고 엄마를 따라나섰던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큰 슬픔에 잠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라고 기획의도를 밝혔습니다.

극 중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모녀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나마 가까이 지내던 엄마(양소민 분)의 지인이 빌려준 돈 대신에 결혼 예물반지를 가져가는 걸 목도했던 던 소녀에겐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게 아녔을까요.




영화는 모녀가 살던 도심에서 벗어나 변두리 리빙텔로 이사 오고 이에 따라 선유(조서연 분)가 전학을 오면서 시작됩니다. 기존 아이들의 시선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응시했던 영화 <우리들><우리 집> 등의 연장선상에서 예측이 어려운 동심의 세계를 그려낼 것 같아 선택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처럼 매우 디테일하게 동심을 담아내는 부분도 있지만 기존 작품과 달리,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 전개는 기성세대로써 부끄러움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어요.


영화 속에서 선유에게 관심을 보이는 정국(최로운 분)의 시선은 소외된 취약계층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을 담고 있어 불편함이 들었고, 선유가 정국과 함께 떼인 돈 받으러 엄마 지인을 찾아가는 시퀀스와 영화 후반부 정국이 실종된 선유 모녀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 대목은 극적인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아빠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따돌림을 겪었던 선유는 마음의 창을 굳게 닫고 또래 아이들과 달리, 애어른처럼 어딘가 어두운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유의 시선과 함께 영화는 "넌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힐책하는 선유에게 장난을 걸며 다가서는 정국의 성장통을 보여줍니다.

꿈을 잃고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살아가는 선유의 트라우마 치유는 뜻 밖에도 아이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수영장에서 물아래 잠수해서 숨을 참는 선유에게 다가선 것도 정국이고, 반 친구들과 소풍에서 선유의 함박웃음을 이끌어낸 것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선유가 닫힌 세상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기회를 롤러코스터 형식으로 그려냅니다.



수영장 신에 이어 엄마의 지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아이스크림을 바꿔 먹는 선유와 정국,  일반적인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선유를 찾아 나선 엄마로 인해 검붉게 달궈진 가스레인지가 내뿜는 자욱한 연기 속에 엄마와 극적인 해후에 이어 지쳐서 쓰러진 엄마가 죽었는지 근심하는 선유의 시선 등 소녀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정국이 부르는 BTS의 노래 '보고 싶다'는 학교 내에서 소외된 선유를 위로하는 유일한 세레나데였고 이는 정국이 선유 모자를 찾아 나설 때도 극적으로 활용됩니다. 아빠가 과거에 불러서 엄마가 좋아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처럼 음울한 분위기와 달리, 소녀의 삶에 용기와 희망적인 동기를  부여하게 됩니다.

단전을 예고한 공과금납부 고지서는 벼랑 끝에 내몰린 선유 집의 재정적 상황을 전하는 소도구로 활용됐고, 성인이 된 표식으로 생리를 시작했는데 축하받지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 외에는 돌보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은 살고 싶다는 소녀의 동심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부끄러움처럼 다가옵니다.




얼마전 살인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을 소재로 인권을 조명한 드라마를 봤는데 부모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빈곤과 슬픔, 이 또한 기회의 불균형이 아닐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이번 영화에서 선유 역으로 열연한 아역배우 조서연은 차가운 현실을 알아버린 열두 살로, 절제된 감정 연기로 몰입감을 더하며, 원빈 주연의 영화 <아저씨>에서 김새론을 봤을 때처럼 <우리집>의 최수인,  설혜인 그리고 <우리들>의 김시아 등과 함께 향후 충무로에서 존재감 있는 활약을 기대케합니다.

스스로 어른이 되기 싫다며 자신을 부정하는 소녀에게 "아빠 보러 갈까?"하고 충격적인 말을 내뱉으면서 동심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부끄러움을 성찰하는 영화 <나를 구하지 마세요>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