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정사 가입기 2

by 초록

날씨 좋은 3월에 차였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소식좌여서 그와 있을 땐 나도 소식을 하게 되었고, 뱃살 아니 거죽 떼기 하나 없는 그의 배를 보며 평소에도 미친 듯이 운동하고 타이트하게 식단 관리를 했다. 근데 이제 다 필요 없어졌다. 주말에 시간이 많아졌고 나는 집순이였다. 최악인 것은 주말에도 잠이 없어 새벽 대여섯 시면 깼다. 할 것 없는 주말이 너무도 길었다. 그래서 계속 먹었다. 빵과 커피를 시키고 나니 밥이 먹고 싶고 밥을 먹고 나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낮잠 한숨 자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팠고, 짬짜면에 미니 탕수육 그리고 소주까지 시켜 혼술을 계속 즐겼다. 그렇게 1-2kg씩 불어나더니 금방 10kg가 쪘다.


모태마름 체질인 줄 알고 살다 돼지가 된 내 모습이 적응 안 됐다. 옷이 작아 옷을 전부 새로 사야 했고 불어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사람도 안 만났다. 그렇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라지 사이즈 옷으로 몸을 가리고 칼퇴하고 집 가서 쿠팡이츠로 혼자 회포를 풀었다. 한번 배달을 주문하면 기본 3번은 연달아 시켰다. 이를 테면 혼술 안주로 살이 덜 찔 것 같은 1인 사시미를 시켰다 양이 부족해서 초밥이나 김치볶음밥 등 밥을 더 시키고 항상 팥빙수나 아이스크림류로 마무리했다. 늘 배탈이 났다. 새벽에 깨서 화장실을 수십 번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내 소식 위장은 슈퍼 엑스라지 위장으로 늘어갔다.


외로웠고, 먹었고, 살이 쪘고, 사람을 안 만났고, 더 외로웠고, 더 먹었고, 살이 더 쪘다.

끝이 없는 악의 순환고리. 점점 무기력해져 갔다. 식욕억제제라도 타야 하나 정신과를 방문했다. 식욕 억제제를 쓰면 너무 세고 관성이 생긴다 하여 다른 약한 약을 처방받았다.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그저 억지로 억지로 보냈다. 그나마 회사를 나가는 날은 나았다. 점심때 식단을 하고 운동도 갔다. 그러나 주말이나 공휴일이 끼기라도 하면 나는 하루 온종일 암막커튼이 내려진 7평짜리 방 안에서 계속 먹었다. 피자 햄버거 파스타 치킨 초밥 당기는 대로 시켜 먹었다. 어차피 사람을 안 만나니 술값도 안 나가고 옷을 살 일도 없고 오로지 쿠팡이츠로만 월급이 나갔다. 오히려 이리저리 싸돌아 다닐 때보다 흑자였다. 그래서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계속 시켰다.


그렇게 사무치게 외롭던 여름 어느 날.

오래간만에 소개팅이 들어왔다. 사진 없는 소개팅. 살집 있고 듬직한 스타일이랬다. 감사하게도 그는 퇴근하고 우리 집 쪽으로 와주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곧 죽어도 세 번은 만나보자고. 완벽한 내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일단 만남을 시작해보자고. 정 붙이고 사랑 비슷한 거라도 해보자고. 소개팅 장소로 가는 내내 백종원, 이상순을 떠올렸다. 연예계에서도 막상 잘나고 잘생긴 사람이랑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하고, 백종원 이상순 같이 듬직한 사람이랑 결혼한 소유진 이효리는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나도

이제는 내 마음 편하게 해 주고 내가 좋아 껌벅 죽겠다는 사람 만나야지.


그는 퇴근이 늦어져 약간 늦게 도착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완벽히 일치했다. 선한 인상, 듬직한 체격, 서글서글한 성격. 얼마나 서글서글한 지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웃겨서 빵빵 터졌다. 그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우린 단품만 먹어도 되는 양식당에서 코스요리를 먹었고 와인도 두 병이나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웨이터가 와서 마감을 알렸다. 우린 아쉬웠다. 그래서 근처 24시간 김치찌개 집을 들렀다. 소주를 쉴 새 없이 까며 히히덕거리다 보니 새벽 세 시였다. 이제 난 졸음이 몰려와 죽을 것 같은데 그는 아침까지 달리자고 졸라댔다. 내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우린 헤어졌다. 그는 집 앞까지 날 데려다주고 내일 또 보자며 헤어졌다.


나는 숙취가 없다.

술이 깨자마자 현타가 왔다. 약간 벌어진 그의 치간. 사람은 좋지만 빙구미 있는 웃음. 듬직한 체격이지만 볼록한 그의 뱃살. 정말 내가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 실컷 잘 놀아놓고 급 현타가 온 나 자신이 나도 신기했다. 날 고민하게 하는 것은 같이 노는 건 재밌지만 ’ 뽀뽀‘를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종종 이 남자와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 뽀뽀‘를 상상한다. 벌써 소름 끼쳤다. 이런 마음으로 그를 또 보는 게 맞나 싶었다. 그리고 일단 겁나 졸리고 피곤했다. 나이 서른이 되니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이틀은 몸져누워있어야 된다. 그는 나에게 오늘 볼 거냐 물었고 나는 몸이 피곤하니 다음에 보자고 미뤘다. 그렇게 고민 끝에 한 번 더 만났다. 조금 더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벌써부터 내가 그를 ’ 하대‘하는 게 느껴졌다. 나를 좋아해 주는 그가 감사하기보다 만만하게 느껴졌다.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았다. 삼프터를 제안한 그에게 나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취소를 했고 그렇게 끝났다. 사무치게 외로워도 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하겠다. 이런 내가 나도 괴롭다.


그 사이 몇 번 더 들어온 소개팅은 집에서 쉬다 귀찮아서 그냥 안 나가기도 하고, 약속장소도 잡지 않은 채로 당일 날 연락하는 노매너 남은 그냥 쌩깠다. 그렇게 집에만 콕 박혀 살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고, 가을이 되었다. 외롭고 쓸쓸한 계절. 다시 소개팅이 물밀듯 밀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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