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지구 반대편에서 마주한 나 자신.

by 초록

늘 한국에서 제일 먼 곳에서 나 자신을 만났다.

제일 보기 싫은 모습으로.


북미/ 유럽/ 동남아/ 동아시아/ 호주.

엥간한 대륙을 다 여행한 나에게 이번 남미 여행은 유일한 탈출구 였다. 이직 후 재발한 매너리즘 및 인생노잼 에 대한 나의 발악. 빙하 트레킹에 파타고니아 등산이라니. 그러고 나선 스테이크에 와인을 펑펑 마셔대고는 탱고를 즐길 수 있는 나라. 듣기만 해도 황홀했다. 짐을 쌀 때부터 탱고쇼에 입을 블랙 드레스와 파타고니아에서 입을 후리스, 겨울 옷가지들을 싸며 하..벌써 다이나믹하다. 좋다. 제발 아이폰만 잃지 않기를.


7박 10일의 여행이 끝나고.

24시간 동안 기절 후 금방 내 생활로 돌아온 지금.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오히려 찝찝한 마음 뿐.

무엇을 위한 여행이었나. 가장 치졸하고 못난 모습의 나는 꼭 고국을 떠나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더 싫다. 대학 졸업 전 3주 간의 유럽여행에서 홀리홀리 찬송가를 들으며 힐링하던 고향 친구. 이태리 여행에 신용카드 결제가 안된다며 내 카드로 쇼핑을 긁어대곤 굳이 막지막날 정산을 하던 아는 언니. 멜버른 여행에서 감기걸려 쉬고 있는데, 우리 숙소에서 파티를 열던 또 다른 고향 친구. 물론 나와 함께 즐거이 여행한 친구도 많았지만. 아닌 인연들은 여행지에서 정리가 되었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늘 내 나라에서 가장 먼 곳에서 나의 밑바닥이 보였다. 한국에선 한없이 너그럽고 나이스 하다 생각했던 나 자신이지만. 여행지에서 한없이 이기적이었다.


앞으로 이런 여행은 원치 않는다.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동행자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소울 메이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소울 메이트였던 몇 몇도 이제 다 시집갔다. 오늘 귀국 기념 친오빠가 오랜만에 삼쏘를 제안했다. 업무 매너리즘이 금방 와 남미까지 갔다 하니. 그는 그저 결혼에 실패해서 그런 거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올해가 되자마자 소개팅이며 결정사며 와인 로테션이며 어플이며 가리지 않고 이성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걔 중엔 인물 좋은 놈. 직장 좋은 놈. 성실한 놈 들이 적당히 섞여 나의 눈만 높여주었고. 결국 저들의 합집합을 찾지 못해 관계로 성사되진 않았다. 94년생. 32살. 아무도 나에게 급하다 하지 않건만 나 혼자 급했다. 나도 모레노 빙하투어 에서 느꼈다. 내가 커플이었으면 이 먼 땅에 올 일은 없었을 거라고. 나트랑 혹은 발리에서 휴식을. 아니 꼭 이국땅이 아니더라도 둘이 포천 캠핑만 가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ㄷㅊ?

한국 땅을 밟자마자 그 전부터 내게 치근대던 아는 오빠가 카톡을 보내왔다. 긴 비행 탓에 자연스레 그 전 연락을 씹었더니 그에게 온 연락 ㄷㅊ? 도착하긴 했는데 그에게 답장할 새도 없이 김치찌개를 흡입하고 24시간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와 있는 연락은 소개팅중? 왜 저래. 여미새인 걸까. 말투도 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다. 나를 좋다고 하는 놈들은 왜 다 저모양인 걸까. 그렇다고 내가 들이댈 좋아할 사람도 없다. 그러니 이 모양. 답장없는 카톡에 무한정 쏟아대는 그의 연락이 무서워 차단을 박고 출근하며 스케줄 표를 확인한다. 바로 내일 결정사 남성분을 만나뵈어야 하는데. 고생해서 빠져있을 줄 알았던 몸무게는 2kg 가 더 쪘다. 무슨 일. 자신감 떡락. 만일 잘 된다면 제일 후덕한 첫 모습을 보여주고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있게 되기를.


그렇게 긴 여행을 마치고 나는 다시 선개팅을 준비한다. 이제는 남미 혼자 여행이 아닌 인생을 같이 여행할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그저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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