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은 크리스마스 직전이 성수기다.
퇴사를 하고 두명의 소개를 받았다.
나는 늘 소개가 몰리는 편.
한 분은 전직장 재무팀 대리.
회사에서 나를 호감있게 봐왔었는데 내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냈다며 나랑 친한 팀장님을 통해 연락을 받았다. 누군지 나는 모름. 사내 카페 오며가며 나를 봤단다.
다른 한분은 은행 과장님.
나이 차이가 조금 났지만 키 크고 스타일이 좋아 대화도 재밌었다. 무엇보다 삼각지의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를 잘 찾아주셨는데 그런 센스와 배려가 좋았다.
재무팀 대리는 아무래도 근처에 있다보니 자주 보게 되었다. 훤칠하고 자상하고 육사출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 사람이 이상하게도 전혀 안 끌렸다. 데이트가 끝날 때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연락도 잘 해주었다. 그저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서 삼프터 제안을 수락했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전직장 사람이기에 그의 팀장님부터 팀원들 모두가 나와의 소개팅 현황을 업데이트 받고 있었다. 나는 이직을 하지만 전직장과 길 한나 건너면 되는 3분 거리였고, 동종업계에서 이런 저런 뒷말 나오는 게 싫었다. 삼프터 까지 하면 다들 무슨 관계냐 신나서 물을텐데 이게 맞나? 뭐 세번까지 만나보고 결정하자! 이번에도 나는 전날 과음이슈로 본의아니게 상대방의 카톡을 읽씹했고, 그리고 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그렇게 정성스레 카톡하는 편도 아니었다. 뭐 걍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삼프터 당일.
저녁에 소개팅 나가기 귀찮다 생각하고 있는데 카톡이 하나 왔다. 혹시 본인과의 만남이 내키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된다는 것.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도 오해할 만 했던 게 내가 연락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단순히 이따 나갈때 연락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나의 일방적인 읽씹에 꽤나 마상을 입으신 듯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직은 마음이 크지 않아서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그랬더니 본인도 잠깐 고민을 해보겠다고 사라지고선. 좋은 분 같은데 본인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정리 카톡이 왔다. 오케이. 빈정이 상할 만도 하셨다. 근데 나도 마음이 안 생기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은행 과장.
분위기 좋은 삼각지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대화를 잘 마무리하고 애프터를 받았으나 문제는 내가 다음날 하와이로 떠난다. 그것도 한 달 동안. 우리의 애프터는 ‘4주 후에 뵙겠습니다‘. 순간, 뭐하러 소개팅과 여행 스케줄을 이렇게 타이트 하게 잡았나 후회도 됐지만 어떻게 될지 모를 남자 하나 때문에 나의 생애 최초 하와이 한달살기 플랜을 변경할 순 없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잊여지나 할 무렵. 2주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고. 안 그래도 하와이에서 신혼부부 들을 보며 외롭던 찰나. 우리는 애프터 약속을 잡고 내가 한국가면 연락하겠다 하고 연락을 마무리 했다. 귀국 후 나는 바로 고향으로 갔고 우리는 5주 뒤에 다시 만났다.
대망의 애프터 날.
점심에 쇼핑하러 나갔다 여의도에 갇혔다.
윤 대통령 탄핵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 저녁에 어떻게 나가지. 걱정했다. 그 때 쯤이면 마무리 되어서 조용하겠지. 정 안되면 택시를 탈 생각으로 나왔는데 젠장. 사람이 더 많아졌다. 다들 파면 확정을 보고 귀가하는 시간 대였다. 버스랑 택시는 엄두도 낼 수 없고 역사로는 이동이 불가하다. 사람 길에 막혀버렸다. 나는 마음이 급해 이리저리 길을 뚫어도 보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달리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여의도에 살면서 매년 벚꽃 축제, 불꽃 축제 때 수많은 인파를 보지만 이번이 역대급이었다. 소개팅 남에게 미안하다고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근데 시간이 점점 지체되었다. 그리고 그 추운 날 멋부리고 나가서 길 한복판에 갇혀 있는데 추워 디질 것 같았다. 점점 성질이 안 좋아졌다. 아....왜 이런 날 애프터를 잡아서 ㅠ
한참을 기다려 겨우 여의나루 역에 진입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을 끊어서 역사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소개팅 남에게 더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보내던 중 그가 이동이 힘들면 다음에 봐도 된다고 했다. 아..겁나 춥고 고된데 그럴까? 싶다가도 이미 역사까지 이동한 게 아까웠다. 왜냐면 어차피 집에 돌아가기도 글렀거든..여기서 집에 돌아가는 것 보다 지하철 타고 삼각지로 나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곧 지하철을 탈 것 같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한 뒤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 어쩌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 되는 거 아냐? 설레발 치며 갔는데 이런. 왜 저번보다 못생겨 보이지? 중안부가 너무 길다. 그리고 엄청 나이차 많이 나는 전여친 얘기를 들려주며 이제는 결혼할 여자 만나고 싶다 얘기하는데 뭔가 별로였다. 섬집에서 꽃게탕에 소주 털고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데 나에게 쓰담쓰담 플러팅 까지 하는 것. 진짜 개 아재다 싶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은행 과장님과의 애프터도 마무리 되었다. 이제는 그냥 이직하고 새로운 곳에서 사람을 소개받자 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보냈는데. 역시 현실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