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을 추구하는 안정형.

직장인의 매너리즘에 관하여.

by 초록
ISTJ


내 MBTI다.

루틴을 지키고 변화를 싫어하는 안정형 그 자체.


우리 집안도 안정형 그 자체인데.

친인척 중 사업가나 자영업자가 1도 없으며, 외가 쪽은 모두 공무원 집안이다.


외할아버지 부터 해서.

아버지, 친언니, 큰이모부, 작은이모부, 외사촌, 새언니부터 오빠의 장인어른까지 모두 공기업 아니면 공무원으로 재직했다.



" 공무원이 최고다 "


친언니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경상도 출신이지만 늘 표준어를 쓰고, 단아한 이미지의 언니는 나의 우상이었다. 언니가 졸업을 앞두고 아나운서 학원을 다닐 때쯤 엄마에게 큰 병이 들이 닥쳤다.

아버지는 휴직을 냈고, 엄마의 장기이식 수술을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내가 12살, 언니가 24살 일 때.

언니는 본인의 꿈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나를 돌보며 공무원 시험 공부를 했다. K-장녀인 언니는 어린 나에게 단 한 번 불평불만이 없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나를 학교로 보낸 뒤에는 독서실로 향했다. 내가 학원을 마칠 때 쯤이면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려주었고. 집안일을 하고. 그렇게 일찍 잠들었다. 우리 언니는 늘 세상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의 중국 체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작은 체구의 어머니에게 딱 맞는 장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상태가 좋은 장기는 중국 고위직 관련 환자들이나 로비를 잘 하는 중국인들에게 먼저 들어가 어머니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대기 끝에 어머니는 수술 일자를 받았고. 회복 후 서울로 돌아오셨다. 언니와 나는 부모님을 뵙기 위해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몇 개월 만에 보는 부모님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야위고 어두웠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울컥해 화장실로 들어가 몰래 눈물을 훔쳤다.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이제 나를 케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취직을 위해 노량진 공무원 학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언니를 엄청 좋아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언니와의 생이별에 또 홀로 화장실에 들어가 눈물을 훔쳤다. 돌이켜보니 초등학생 치고도 자존심이 굉장히 센 편이었다 보다. 언니가 서울로 가는게 아쉽다 슬프다 한 마디 못하고 화장실에서 소리없이 눈물을 훔치다니...성실하고 똑똑한 우리 언니는 학원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시험에 바로 합격했다.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지내느라 고향에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 사이 친오빠는 제대를 했다.

경상도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오빠에게도 당연히 공무원 학원을 가라는 푸쉬가 이어졌다. 그러나 오빠는 본인의 꿈을 지켰다. 오빠는 서울의 큰고모 댁에서 지내며 학원을 다녔다. 1년 뒤 오빠는 서울의 한 기업에 취업했다. 공무원 집안의 틀을 깬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빠의 영향으로 나는 교대를 꿈꾸다 상경을 목표로 방향을 틀었다. 나를 응원해주던 학교 선생님들은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무조건 교대를 가야된다고 하는 분들도. 이제 교권은 다 무너졌으니 더 큰 세상에 가서 놀으라는 분들도 계셨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대학교 3학년.

다시 갈림길에 섰다. 사기업에 지원할 것인지. 노량진 공무원 학원을 등록할 것인지. 나는 은행에 가고 싶었지만 나의 학점이나 스펙이 많이 모자랐다. 아무래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공무원 밖에 답이 없어보였다. 학교 취업상담소 선생님은 나의 스펙을 보더니 요즘은 블라인드 채용하는 곳도 많으니 사기업도 충분히 가능해보인다 하셨다. 그렇게 나는 사기업 취업을 목표로 뒤늦게 학점 관리에 들어섰고, 4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평균학점 A를 넘겼다. 대기업 인턴십 서류전형에 몇 차례 붙기도 했다. 면접에서 광탈했지만..


최종 합격.

4학년 수료 후 지원한 중견기업 전환형 인턴십에 합격했다. 3개월 후 정직원이 되었고. 그 회사를 7년 간 다녔다. 재밌는 건 그 회사는 친오빠가 다니는 회사의 자회사였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은 내가 오빠의 빽으로 들어갔다고 수근댔다. 기가 찼다. 중견기업 대리 나부랭이가 빽이 어딨다고...내가 다니던 회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이후 친오빠는 2번의 이직을. 나는 1번의 이직을 해 서로 다른 회사로 찢어졌다. 나는 정규직 공채로서의 혜택을 다 누리기도 전에 도망 나왔다. 지겨워서.


첫 이직.

7년을 다니고 도망온 곳은 천국이었다. 더 큰 회사. 더 똑똑한 동료들. 더 두둑한 상여와 복지금.

대기업은 진정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전직장에서 매너리즘을 극복하려 운동에 미치기도, 여행에 미치기도 했지만. 이직을 하고 나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계속 공부하고 내 커리어를 성장시키기 위해 몰입했다. 한 3개월 정도..? 나는 금방 적응했고, 금방 지겨워졌다. 그렇게 다시 살이 찌기 시작했고. 네이버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컴포트 존을 떠나서


포카칩.

나는 어릴 때부터 파란색 포카칩만 먹었다. 과자도 늘 먹던 것. 카페도 늘 가던 곳만 간다. 굳이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는다. 늘 하던대로 하는 게 편하고 안정되니까. 굳이 모험을 즐기지 않았다. 생각보다 겁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생각지 않은 변수들은 나를 늘 피곤하게 했다. 어느순간 부턴 내 일상도 루틴으로 채우려 노력했다. 출근 전 운동을 하고, 점심 때 독서를 하고 저녁엔 피부과에 들렀다 넷플릭스를 보고 쉬는 것. 내 루틴을 딱딱 지킬 때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세상 제일 안정 추구형 인간인 줄 알았다.


발리 행 티켓.

긴 추석 연휴. 고향에 내려가 소파에 누워 티비만 보며 허비하기 아까웠다. 그렇게 발리 행 티켓을 끊었다. 제일 비싸게.

해외 혼여는 이번이 네 번째다. 첫 번째는 인턴십 발표 직후 오사카 3박 4일. 두 번째는 전 남친의 스토킹을 피해 도망치듯 떠난 프라하 7박 8일. 세 번째는 이직 직전 다녀 온 하와이 한달 살기. 오사카 여행은 3일차 쯤부터 외롭고 심심했다면, 유랑에서 동행친구들을 사귄 프라하 여행,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한 하와이 여행 모두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혼여도 지겨워 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 여행이 주는 새로움도 줄어들었다. 근데 나는 왜 다시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가..?


컴포트 존이 싫어서.

이직을 한 이유도. 매번 여행을 하는 이유도.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이 싫었다. 안정감을 느낄 때쯤이면 영락없이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무기력은 나를 무너뜨렸다. 술을 찾게 하고, 폭식을 일삼고, 살아 갈 이유를 찾지 못하게 했다. 눈 뜬 시체로 살게 했다. 그 즈음 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매일이 변수인 여행을 즐겼다. 이번 발리 행 티켓을 끊으며 나는 왜 자꾸 떠나는지 근본적인 원인이 궁금해졌다. 알고보니 나는 상수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변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31년 만에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깨달았다. 상수 투성이인 일상에서 벗어나 변수들만 찾아 다니니라. 이번 여행에선 좀 더 모험을 즐기기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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