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어학원에서의 내 첫 선생님은 유럽소녀들과 2시간을 내내 게임만 했다.
다행히 나와 스상무님은 같은 반이었는데, 우리는 수업 퀄리티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우리가 고작 게임하려고 이 비싼 돈 주고 온 게 아닌데. 스상무와 나는 논의 끝에 학원장에게 메일을 보내 반 변경을 요청했고, 비록 우리는 반이 찢어졌지만 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나의 두 번째 선생님은 일본계 미국인 할아버지인 James 였다.
그는 수업 내내 내가 소외되지 않게 중간중간 한국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해주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내가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다. 그런 그의 섬세함은 물론, 단어와 문법까지 아우르는 완벽한 커리큘럼에 나의 수업 만족도는 100% 였다.
주에 1번은 특정 주제를 가지고 소그룹으로 나누어 토론을 했다. 한 번은 사랑과 결혼에 대한 토의를 하던 중 James가 이런 얘기를 했다.
모든 이혼은 다 Expectation 때문이라고.
소름 끼쳤다. 며칠 전 Bryan이라는 친구와 이혼의 원인은 돈이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Expectation이 원인이라니.
James는 모든 관계에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대는 곧 실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동시에 나도 생각했다. 나는 왜 몇 번 보지도 않은 Grant 가 나와 매일 놀아줄 거라 기대했을까? 나는 왜 매번 남자친구를 사귈 때마다 집에 데려다 주기를, 내가 늘 1순위 이기를 기대했을까?
나의 모든 관계를 망치던 원인이 ‘기대’ 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저렇게 인자한 얼굴로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기대’를 갖지 않는 James가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진짜 가능한 걸까? 사람이라는 게 기대를 안 하려 해도 관계가 깊어지고 내가 잘해줄수록 기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그 이후로, 나도 James 처럼 그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늘 상대에게 무언가를 줄 때, 예를 들어 작은 선물이나 배려 등, 그 대가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특히 이성관계에서 만큼은 나도 모르게 늘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빼빼로 데이인데 초콜릿 하나는 사주겠지? 크리스마스인데 작은 선물 하나는 사 왔겠지?
지나고 보니 나는 서프라이즈 충이었던 걸까. 30대가 되고 이제 그런 것은 챙기기도 받기도 싫다 생각했건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사실 그런 것들을 바랐던 것 같다. 약간 웃프지만 내 성향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뭐 앞으로 그런 섬세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받아들여야겠지. 받아들여진다면..ㅎ
영어를 배우러 간 곳에서 인생을 배워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보다 영어가 진짜 안늘기도 했다. 영어단어 안 외웠고. 그냥 유럽친구들만 따라다녔다. 우버를 쉐어하거나 식당을 같이 갈 때는 굳이 내가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관계에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내 마음보다 크거나 같은 마음을 받는 것은 부모님 사랑 말고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 하는 것.
James 의 이 말을 잊지 않고, 다음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꼭 이때 느꼈던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