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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by seon young

7년 연애의 시작. 시작은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와의 시작은 회사에서 시작된다. (그 시작이 좋은 시작이었는지 나쁜 시작이 될런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인턴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대리님이 본인의 친구와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했다. 입사 후 3일만의 일이었다. 나는 그 때 패션매거진 마케팅팀의 인턴이었고 남자친구는 잡지사 기자였다.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남자친구가 무슨 잡지사에 다녔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7년 전의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무튼 얼굴도 모른 채로 소개팅에 나갔다.


잡지사 기자라는 것과 나보다 3살 많다는 점 딱 그 두 가지만 알고 나갔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난 참 무던한 사람이었거나 회사 선배의 말이라면 쉬이 거절하지 못하는 순둥이었다.



소개팅은 그 당시 핫한 음식점으로 떠오른 '에머이'였다. 종각역 부근이었는데 날씨가 꽤나 추운데도 멋을 부린다고 맨발에 미들힐을 신고 나갔다. 벌벌 떨며 남자친구를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친구는 늘상 나를 기다리게 만든다.


우리의 소개팅 음식은 쌀국수와 짜조. 보통 소개팅에서는 대화하느라 음식을 잘 못 먹을 텐데. 남자친구는 첫 만남에서 본인의 쌀국수 한그릇을 비우는 것도 모자라 짜조 한 접시를 몽땅 비워냈다. 게다가 그 집이 맛집이라 우리는 첫 만남에 20분 정도 웨이팅도 했다. 남자친구는 소개팅에서도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하는 맛잘알이었다.


7년 연애의 모든 순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날은 유독 뚜렷하다. 쌀국수 한그릇을 싹싹 비운 남자친구와 근처 카페엘 갔다. 음식점에서는 모든 음식을 비워내더니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문한 그가 조금 의외였다.


내가 그날 기억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남자친구의 허언이다. 남자친구는 담배를 끊고 있다고 했고 안경을 벗고 렌즈를 껴보려고 시도 중이라고 했다. 웬걸. 7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전자담배를 끊지 못했고 생일 선물로 백 만원짜리 안경을 원하는 여전한 안경유저다. 그래서 난 소개팅에서 하는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역시 사람은 만나봐야 안다!




여기부터는 남자친구가 정말 안 봤으면 좋겠는데...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7년 전이니까 봐줄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는 패션센스가 정말 꽝이었다. 빨간색 더플 코트를 입고 온 날에는 멀리서 보자마자 진짜 고추장 바른 멸치인 줄 알았다. 휴.


그래서 이번 소개팅에 나갈 때 가장 바랐던 점은 1순위도 센스. 2순위도 센스였다. 다행히 남자친구는 센스있는 사람이었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패션센스였다. 맨발이 여전히 시려운 겨울에 코트 안에 자켓을 입고 나왔다. 보통 아우터를 두 개나 겹쳐 입는 것은 패션 업계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 그게 참 센스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센스있는 연애를 하겠구나! 싶었다.


화이트데이에는 가장 유행하는 초콜릿이나 마카롱을 선물해줄 것 같았고, 저도 발렌타인데이에 작지만 비싼 초콜릿을 선물했을 때 감동받을 것 같은 그런 센스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허세만 가득 들었던 어린시절. 지금은 맛있고 사이즈 큰 케이크가 더 좋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세 번 정도 만나고 나한테 사귀자고 했는데 난 사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실 세 번 만나고 확 끌리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고요) 그래서 고민해보겠다고 했는데 집에서 혼자 잘 생각해보니 이 사람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옷을 잘 입는 그의 패션센스가! 그래서 다음 번 만나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책 속에 '나도 오빠가 좋아'라는 메시지가 담긴 카드를 함께 꽂아 넣어 선물했다. 귀여웠던 그 시절의 나.


처음은 그렇게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시작됐다.




(Photo Epilogue) 오늘의 사진은 7년 전 소개팅 당시 먹었던 쌀국수와 짜조 사진입니다. (화질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와 설마했는데 소개팅에서 사진 찍었다니! 덕분에 글에 딱 맞는 사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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