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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S Apr 27. 2023

왜 하기 싫을까?

실패의 두려움에 대한 고찰


오전 10시에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일찍 자고 뚜렷한 정신으로 내일 해야지,라고 다짐한 어젯밤의 나는 아직 비몽사몽이다.

일단 걸어 나오기는 했으나 출근을 할 필요가 없는 나는 머릿속의 할 일들을 정렬하는데만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몸에 베인 우선순위에 따라 엉기엉기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가글을 한다. 방으로 돌아와 약을 먹는다.

자, 다음엔 뭘 할까.


오늘 아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직전 1시간 전의 내 모습이다.

마땅한 규율 없이 사는 삶은 내게 여유로움과 행복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의 유한함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작년 인턴을 마지막으로 일을 하고 있지 않기도 하고, 몇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하나둘 정리해 온 터라, 해야 할 ‘일’ 자체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가리라는 법은 없다. 할 일 없이 무기력하지는 않을까, 하는 틈으로 매일같이 자잘한 집안일이 눈에 띈다.


최근에 들인 화분 대여섯 개를 관리하는 일만 해도 분무하랴, 환기하랴,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성장세에 따라 분갈이를 하는 등 꽤 시간을 쓰고 있다.

취미라는 이름 하에 밀도 낮은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자라나는 새순들을 보면 뿌듯한 한편, 그저 봄이 옴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은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아이들의 생장에 나는 직접 관여하긴 하지만, 그만큼 나의 시간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가습기의 수증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식물은 그저 빛과 물, 흙만 있으면 자라난다. 이들이 화분이라는 틀에 갇혀 있지만 않다면 어쩌면 거의 무한히 자라고 번식할 것이다.

반면 인간의 시간은 다르다. 나는 몸을 움직여 이 시간의 밀도를 채워가야만 한다.


그런데 막상 할 일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집안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다양하다.

집안일에는 이렇다 할 우선순위가 없기에,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사실 하나씩 손에 잡히는 대로 해나가도 무방하다.

하지만 나는 취업이라는 최우선 목표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집안일(설거지, 화분 관리)에 시간을 쏟다 보면 정작 해야 할 일이 훌쩍 멀어져 버리고 마니까.


최근에는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곤 해서, 하루에 거의 2-3시간 밖에 작업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마음은 조급하고 할 것들은 많은데 뭔가 이상했다. 하기로 생각한 일들이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밀리고, 도중에 다른 일들을 벌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름대로 생산성 툴들을 이용하고 있긴 했지만, 정해둔 루틴대로 생활이 되지 않고 있었다. 충동성이 나의 일상을 뒤죽박죽 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충동성을 억제하고 당장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후다닥 처리해 버리는 습관이 절실했다.


핸드폰은 던져버려야 했다. 지금 내게는 수많은 SNS와 흥미로운 앱들의 유혹을 뿌리칠 의지력이 없기 때문에.

나는 당장 집에 방치되어 있던, 다이소에서 사 온 화이트보드를 방 거울 앞에 실리콘 테이프로 철썩 붙여버린다.


몽롱한 머리 상태지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들을 적어 내려 간다.

쓴다고 무조건 해치우지는 않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제한도 붙여본다.

꽤 효과가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딴 길로 새거나 하던 도중 쓸데없이 몰입해서 시간을 더 할애하는 일도 있었지만, 나의 충동성을 되돌아볼 수 있어 다소 충격 요법이 되었다.


이름하야 한 번에 세 가지만 처리하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할 일 세 가지를 적고, 정한 시간 동안 무조건 완수하는 것이다.

완료할 때까지 시간을 초과하면 쉬는 시간을 줄였고, 시간이 남았다면 그만큼 좋아하는 일에 더 시간을 썼다.

뒤죽박죽인 할 일들을 우선순위도 없이 단순 일관적으로 처리해 나가는 방식이라, 사실 시간관리나 생산성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무기력한 내게 당장의 가벼운 압박감과 심리적 보상을 줌으로써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뿐.

또, 앞서 말했듯이 충동성을 확인하고 제어하는데 도움이 됐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무거운 무기력함과 불안함,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었고 원하는 대로 할 일들을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최근 화두인 성인 ADHD인 게 아닐까? 하고 관련 서적들을 대출해 발췌독하기도 하고, 충동성을 조절해 보고자 나름대로 이런저런 행동교정을 시도했다.

모든 시도들이 하루아침에 나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날 하루를 겨우 견디는 시작을 끊어주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 삶의 유지보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주는 아침에 1시간 동안 집에 이미 있는 나의 책들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나에게 이렇게나 실망감을 느끼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 헤맨 것이다.

이런 감정적 동요와 불안감이 처음은 아니었던지라 집에 생산성 관련 서적들을 더러 사둬,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고는 한다.

어제는 <해빗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과 <하이퍼 포커스>를 발췌독했다.

그리고 오늘 꺼내든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나의 정서적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현재 나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기 위하여, 나의 병과 나의 불안감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인간의 ‘우월성 추구’라고 하는 감정에 의해 나의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열등감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지만, 이를 건전한 노력과 성장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지금의 나처럼, 불행을 무기로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금의 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현재의 생활양식을 바꾸고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라는 것은 나의 무의식이며,

나는 지금 ~~ 한 이유로 노력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변명하는 것은,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 즉 나의 가능성을 그저 가능성인 채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집중력을 개선하려는 것도, 습관 형성 책을 읽는 것도 모두 생활양식을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은 사실은 이미 나의 현재 생활양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즉 변화하고 싶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나보다 더 나아질 용기, 불안하고 예측불가한 미래임에도 한 발짝 나아가는 용기 말이다.


졸업 직후, 호기심 반 야망 반 처음 내디뎠던 사회생활의 기억은 한 줌의 씨앗을 안겨주었다.

희망과 격려의 씨앗은 발아하지 못하거나 자라다 멈췄고, 어떤 것은 썩기까지 했지만, 두려움의 싹은 움트고야 말았다.

첫째는 내가 나의 졸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자책, 그리고 이 증상을 영원히 개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둘째는 내가 어쩌면 나와 회사가 바라는 것 이상의 실력과 잠재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첫 번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약을 처방받아먹고 있고 어느 정도 생활습관이 잡히고 있다.

회사 생활처럼 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겠는 미지의 두려움이 약간 남아있는 듯하다.

두 번째 두려움은 예측불가능에 대한 두려움과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나는 잠재력이란 잠재력으로 존재할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실패를 겪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월성의 추구보다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는 더 큰 듯하다.


왜 나는 실패를 이토록 두려워할까

그건 나 혼자서 오롯이 실패를 감당해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중학생 때부터 오랜 시간 미술 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대체로 주어진 목표에 따라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도 썩 나쁘지 않았다.

대학 입시를 거치면서 다소간 나의 자만함과 오만함을 마주할 수 있었지만, 남은 자책감은 비난의 화살이 되어 학원에게로 향했다.

누군가와 함께 실패할 기회를 나는 대부분 놓치고 말았다. 유사한 실패를 겪고 있는 또래들이 주변에 넘쳐나던 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그러자 이후 근 몇 년 간은 나의 기면 증세에게로 화살을 돌렸고, 결국 그 끝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은 실패였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천히 젖어가는 벽지에 곰팡이가 피듯, 보송하던 공기가 무거워지고 포자는 새로운 두려움을 낳고 방을 점령해 나갔다.

불안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했고, 관계를 망치기도 했다.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환기를 시킬 창문을 찾아 가만히 벽을 더듬어나가려는 시도다.

환기를 시작으로 하나씩 두려움이 피어난 벽지를 걷어내야 한다. 그다음은 새로운 벽지를 바를 차례다.


나의 인생이 극이라면

선생님, 또래 친구들이 관객으로 들어왔다가 퇴장한 지는 오래이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던 부모님조차도 이제는 자리를 옮겼다.

객석에 앉아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다. 진지하게 몰입하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다 오열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얼굴 한가득 환하게 웃다가, 미소 지으며 퇴장하면 한다. 좋은 작품이었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터무니없는 도전과 뻔한 실패, 모호한 성취일지라도 나 자신만큼은 열정팬이 되어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어서다.


자, 스토리 분석하기는 내 (복수) 전공이니까.

극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를 첨가해야 할 때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 운명적 갈등, 지지자와 스승을 만나고, 성장통을 겪지만, 결과적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그 전개.

성장통은 절정 단계의 사전 준비물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이런 구조의 크고 작은 갈등들을 나는 밟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한 만큼 절정이 멋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뭐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있으니 관객에게 웃음을 줄 수만 있다면 좋겠다.



하기 싫은 이유는 내가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이유는 언제나 선명했다.

그저 두려움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차근차근 눈앞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모아보자.

객석의 중앙에서 내가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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