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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Sep 22. 2023

미술관 가는 길

치유의 걸음 

한국에 들어오면 꼭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보려고 했었다. 주제도 길 위에서라 늘 짐을 싸고 길을 떠나는 마음에 위로를 얻고 싶었다. 관련 책도 사서 읽었었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152724


미술관의 공기는 왜 그렇게 사람을 설레면서도 편안하게 할까. 특히 유화 전시실은 유화 냄새로 가득한데 그 향이 너무 좋다.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입시미술을 하려고 학원을 다녔는데 재능과 끈기의 한계를 경험하고 바로 공부로 전향을 했었다.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학원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았다. 입시미술을 하던 시절은 힘들었지만 지금도 그 시절 그림을 그리던 그 교실의 냄새 분위기는 여전히 그립다. 


20대 언젠가 시립미술관에서 인상파 전시를 한 적이 있었다. 고흐를 시작으로 인상파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던 나는 전시를 놓칠세라 추운 겨울 패딩을 두르고 눈 덮인 언덕을 올라 미술관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때 윌리암 터너를 처음 보게 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흐와 세잔만 알았던 나는 처음으로 터너가 그렸던 빛을 보았다. 그는 항상 빛을 그렸다. 물론 인상파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터너의 생생한 빛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었다. 뭐 하나에 빠지만 정신을 못 차리는 성향이라 대학생시절 부족한 용돈을 털고 헌책방을 다니며 화집을 사고 엽서를 사 방에 놓곤 했었다. 


특히 폭풍과 빛을 그린 그림에서는 늘 희망이 보였다. 터너는 풍랑을 만났을 때 뱃머리에 자신의 몸을 묶고 풍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냈다고 한다. 그는 그 풍랑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아 그걸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리고 그 믿음이 그에게 그런 그림들을 그리게 했을 것이다. 


바다 위의 어부들(Fishermen at Sea, 1796)


대학생시절 당시 사업을 하시던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부모님의 지원으로 영국에서 1여 년을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너무 감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지원이었을지 상상이 안된다) 그때 빨간 버스를 타고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갔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매주 일요일인가 월요일이 무료입장이라서 시간 맞춰 갔었다. 10월의 런던은 관광객이 많지 않고 한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봤었다. 봤었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기이한 경험이었다. 


정말 손만 뻗으면 그림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가가지 말라는 가림끈(?) 같은 것도 하나 없이 고풍스러운 방을 가다 보면 갑자기 나타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2004년의 일이다) 너무 놀라서 처음에 가짜인가 생각했을 정도이다. (정말 가짜이고 진짜는 어디 잘 보관되어 있을 것 같긴 하다) 한참을 그 앞에 놓여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앞에 의자가 있는 것도 신기하고 좋았다. 한국의 전시는 아마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든 미술관을 가고 싶다. 나는 호퍼의 전시 자체의 관심보다는 호퍼의 전시를 보러 가는 나 자신을 느끼고 싶었다. 하루 꼭 휴가를 내고 일찍 집을 나서 커피를 마시고 노트에 끄적이다 전시시간에 맞춰 들어가 천천히 미술관을 느끼고 싶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천천히 걸으며 전시장을 거닐고 싶었다. 어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아마 실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시립미술관을 좋아한다. 가는 길을 더 좋아한다. 정동길을 따라 어디로든 좋다. 서대문 쪽에서든 시청 쪽에서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시 최고는 가을이다. 가을에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길을 따뜻한 커피와 함께 걸으며 미술관으로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이미 치유가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를 보러 가는 길, 좋아하는 맛집에 가는 길,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 자신만이 가진 치유의 순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오래도록 못하면 마음이 조금은 비어 가는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대학원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며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참 가고 싶은 전시를 찾아보았다. 뜨거운 여름을 달군 호퍼의 전시는 8월 말에 끝났다. 아마 겨울이 되면 새로운 전시들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날에는 아침 일찍 KTX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광화문 블루보틀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하고 와플로 아침을 먹어야지. 그리고 따뜻한 머플러를 두르고 걸어서 천천히 시립미술관으로 갈 것이다. 그 때즘이면 나도 새로운 걸음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사진: Unsplash의 Blake Ch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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