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박하 Apr 03. 2024

천천히 밥 먹기

나를 돌보는 일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뭔가 맛을 위해서 밥을 먹었다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그래서 밥 먹는 시간도 엄청 짧고 급하게 먹었다. 원래 결혼 전에는 밥을 느리게 먹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 점심시간 종칠 때까지 밥을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일을 하며 밥을 챙겨 먹는 일은 거의 영양소 섭취에 가까웠다. 가끔 (아니 종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불닭볶음면과 떡볶이를 흡입하기도 했다. 식사시간이 너무 빠르고 급하게 먹다 보니 몸에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한 끼 만이라도 천천히 먹기로 했다. 일하면서 먹는 점심이나 아이와 함께 먹는 저녁까지 천천히 먹긴 어려우니 아이 등교 시키고 먹는 한 끼 만이라도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기로 했다. 새삼 이렇게 내가 거의 삼키듯이 먹었나 싶을 정도로 음식의 식감이 생소했다.


점심에 일하면서 주로 나물과 밥을 먹는데, 그냥 꿀꺽 삼키던 취나물의 식감이 이렇게 다채로웠나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씹어야 부드러워지는 줄도 알게 되었다. 뭔가 쌀로 밥 짓는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너무 오랜만에 밥을 천천히 먹다 보니 새삼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자꾸만 먹고 일을 빨리 시작해야지 싶다가도 그래봤다 20분 정도 차이라는 생각에 숨을 깊이 내쉬고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어느 날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올리브유와 후추에 빵만 먹는 간단한 레시피인데 아주 맛있다. 비건 식단이기도 해서 즐겨 먹는다. 물론 환경을 생각하면 아보카도도 먹으면 안 된다는 책을 읽은 후로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먹고 있다. 아보카도와 통밀빵, 그리고 올리브유의 향기가 이렇게 좋았나, 후추와 페페론치노의 풍미가 이렇게 좋았다 싶었다.


그렇게 천천히 밥을 먹으면 걸리는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이다. 그동안은 한 3분 정도에 먹었던 것 같다. 20분 정도 천천히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나를 위해 건강한 습관을 갖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기분을 좋게 한다. 그리고 천천히 재료들의 맛을 음미하는 순간 자체가 주는 여유와 기쁨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며 온전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할까, 어제 그 일은 어땠지, 책에서 읽은 내용이 좋았지 등등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는데 밥을 천천히 먹으니 당장의 해야 할 일을 처내는 것을 넘어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새삼 깨달았다. 


일하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하는 시간 이외에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니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밥을 천천히 먹다 보니 느껴졌다. 전에는 커피 한잔 마시며 멍 때리는 것도 잘했는데 한동안 정말 여유가 없었구나 싶었다. 


봄이 오고 벚꽃이 피고 날씨가 풀리고 조금 더 산책할 수 있는 날들이 오고 나서야 겨우 나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조금 찾아온 것 같다. 얼마나 이 기간이 오래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분간 밥 꼭꼭 천천히 먹으며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얼마나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전 02화 인풋이 필요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