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에서 엄마로 돌아가는 시간
싱글맘은 아닌데 암튼 싱글 워킹맘이 되었다. 남편이 석사 하러 영국으로 떠나고 아이와 둘이 지내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짐 싸들고 친정으로 들어갔겠지만 이제는 아이도 부쩍 컸고 이 도시에서의 생활이 너무 안정되어서 가지 않고 둘이 지내고 있다. 영국으로 가는 옵션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케냐-카메룬-한국-영국 이렇게 1년 단위로 옮겨 사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못할 일이었다.
사실, 남편이 떠나기 전에는 좀 불안했다. 잘 지낼 수 있을지. 아이는 괜찮을지. 나 일하다가 맨날 우는 거 아니야 싶었는데 웬걸, 나는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고 있다. 특히 남편 하나 없다고 집안일이 너무 줄어들어서 놀라고 있다. 한 명 있고 없고 가 차이가 크고 먹고사는데 그렇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거였다.
집안일 루틴은 보통 이렇다. 아침에 아이 깨워서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난 뒤에 빨래만 돌린다. 설거지는 하지 않고 바로 일을 시작한다. 일은 8시 반에 시작해서 5시 반에 끝난다. 가능한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일하는 중에는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도 빨래를 꺼내서 건조기에 넣고 건조가 끝나면 꺼내는 정도는 한다. 그리고 먹고 나면 물을 뿌려두는 정도를 한다.
그리고 정말 맹렬하게 일을 한다. 사실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전 직장에서는 일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다시 되돌아봐도 정말 일도 잘 못하고 집중도 안되고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꼭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난 직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지금 집중해서 주어진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이 환경이 너무 감사하다. 이러한 환경도 사실 싱글 워킹맘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점심은 냉장고에서 밥과 반찬과 김치를 주로 먹는다. 반찬은 주말에 조금 해둔다. 여기저기서 받아온 밑반찬이 아직도 많아서 밥이랑 같이 먹으면 딱이다. 거의 완전 한식파 아니 밥 파여서 밥을 꼭 먹어줘야 한다. 밥이랑 반찬에 탄산수 하나 주로 같이 먹었는데 요새는 가을이라 그런지 국 생각이 나서 집에 있는 오뚝이 즉석국을 데워서 같이 먹는다. 밥은 거의 10분이면 다 먹고 이마저도 일하면서 먹는다.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점심시간의 여유는 반납했다. 다만 요새 건강이 좀 안 좋아진 것 같아서 날씨 좋은 날은 잠깐이라도 산책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오고 학원에 가는 소소한 일들을 챙기고 아이가 돌아와 집에서 놀면서 어지르는 것들은 아이가 치울 정도만 치우게 하고 그냥 둔다. 아이도 자유롭게 가지고 놀며 뒹굴거리며 휴식을 취하다 보면 어느새 5시 반이 된다. 거의 칼같이 일을 정리하고 나와서 그때부터 집안일을 한 시간 동안 해치운다. 이 시간이 처음에는 조금 스트레스였다. 일하고 나왔는데 또 일이 있으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 익숙해지기도 하고 뭔가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 하나 틀어놓고 일하면 또 하나의 휴식 시간이 되었다. 집이 점차 정돈되어 가는 것을 보면 더 기분이 좋다.
그리고 사실 일하다가 나와서 아이를 보면 처음에는 내가 아이가 있는 사람이구나 싶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며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시 엄마도 돌아오게 된다. 아이 가방도 열어서 뭘 가져왔나 보고 하다 보면 정신이 돌아온다.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머리카락을 치우고 어질러진 장난감과 종이 조각들을 치우고 빨래를 정리하고 나면 6시 반쯤 된다. 그러면 아이의 저녁을 준비해서 먹인다. 나는 아침과 점심을 많이 먹고 저녁은 거의 안 먹고 씻고 나서 무알콜 맥주나 탄산수를 한잔한다. 아이가 저녁을 먹고 나서 유튜브를 보는 동안 씻고 나와 이제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간식도 챙겨주면 이제 잘 시간이다. 최근에는 국어숙제만 있어서 숙제가 금방 끝나는데 한동안 구구단 숙제가 있을 때는 정말 전쟁 같았다. 국어와 수학이 같이 숙제로 나오면 11시까지도 안 끝나기도 한다. 암튼 숙제가 끝나면 아이는 자기 전에 간식을 조금 더 먹고 양치질을 하고 잠이 든다. 둘이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잠이 든다.
그렇게 평일 일정이 진행되고 주말에는 좀 더 여유 있다. 늦게 일어나고 느지막이 밥을 챙겨 먹고 오후가 되면 집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평일에는 돌돌이로 머리카락만 정리하고 청소기는 주말에만 돌린다. 화장실청소도 주말에만 한다. 둘만 사니 크게 어질러질 게 없어서 정리할 것도 많지는 않다. 사실 남편이 집을 어지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가고 나서 집이 훨씬 덜 어질러지는 것은 미스터리이다. 주말에 그래도 청소를 해두고 쓰레기도 버리고 해야 일주일이 또 깨끗하다.
이 모든 과정이 전혀 스트레스가 아닌 것은 조별과제가 아닌 개인 과제여서 그렇다. 남편이 같이 있을 때에는 사실 일을 나눠서 하다 보니 안되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내 맘대로 되는데 아니어서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하다 보니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이 되니 스트레스가 훨씬 덜 하다. 역시 사람은 몸보다 마음이 힘들게 더 힘든 것 같다. 또 극 내향형인 나에게 하루에 혼자 있는 시간이 보장되니 에너지도 훨씬 덜 쓰게 된다. 그래서 지금 혼자 아이 보며 일하는 생활에 대해서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나에게는 좀 휴가 같은 시간이다. (남편 미안)
아마도 내년에는 어떻게든지 남편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게 영국이든 한국이든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때까지 이 평화로운 휴가를 다시 잘 지내보려 한다.
사진: Unsplash의 Brian Wangenhe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