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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Oct 28. 2020

옷을 사지 않기 위해 옷을 버렸다

소비단식일기 (11): 종이인형 오리기에서 ppt까지

Photo by piotr szulawski on Unsplash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 아동복 사업을 하시던 큰어머니가 늘 철마다 보내주시던 최신상 옷을 입었다. 사업을 하던 엄마는 늘 풍족했고 같이 보내는 시간 대신에 많은 부분을 물질로 보상해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모자에 관심이 많아 한둘 사모아 20개도 넘는 모자가 방에 걸려있었다. 치마와 색을 맞춘 가방들도 있었고 옷을 잘 입고 학교에 가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중학교 시절은 사춘기가 조용히 찾아와서 잠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시 의류에 대한 열망을 쌓아 올렸다. 고등학교 시절이 대한민국 잡지 전성기였는데 그때 잡지를 보면서 스멀스멀 물욕을 쌓아 올렸다. 친구들은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디다스 슈퍼스타나 에어포스를 사던 시기였다. 나도 용돈을 모아 모아 그 시절 유행하던 퀵실버니 폴로니 사들였다. 동네 보세 가게에서 이미테이션 제품들도 사서 입고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지방에 있는 기숙사 학교를 다녀서 처음에는 정말 대충 입고 다녀도 괜찮았고 용돈만 받아쓰던 때라 특별히 문제는 없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리바이스 엔지니어 스커트와 티셔츠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사고를 쳤는데 엄마 아빠 한데 호되게 혼나고 메꾸긴 했었다. (부끄러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말할 수는 없다. 잘못이긴 하지만 범죄는 아니다). 아 그때부터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 역사가 길다는 걸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가을이 되니 가을 옷을 너무너무 사고 싶은데 옷이 없으면 얼어 죽을 지경이어야 옷을 살 수 있는데 지금 세보니 청바지만 10개가 넘는다. 나이로비 집에 두고 온 옷들도 꽤 되는데 다 합치면 행어가 8개즘 있어야 할 것 같다. 늘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데 왜 이렇게 사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많아 보일까? 지금 가장 사고 싶은 옷은 긴 플리스 재킷이다. 작년에 우연히 알게 된 겨울 외투가 없는 외국인 노동자분에게 입고 있던 무스탕을 벗어준 후로 맘에 드는 겉옷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다. 같은 옷은 이제 생산을 하지 않아 구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옷을 사야 옷을 그만 사고 싶어 질까. 역시 핀터레스트를 그만 봐야 하는 건가.


어린 시절 종이인형을 잘라 옷을 갈아입히고 놀던 아이는 자라서 줄무늬 티만 6개 넘게 가지고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마음에 드는 옷은 깔 별로 쟁여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몇 번이고 미니멀 라이프 책을 보며 다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년까지는 속옷이나 양말 이외에는 살 수가 없기에 아침마다 옷 입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게 필요했다.


재수생 시절, 학생도 성인도 아닌 불완전한 상태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전에 항상 다음날 입을 옷을 다녀놓았다. 다리지 않아도 되는 폴로셔츠나 티셔츠도 다려서 문 앞에 걸어두고서야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전날 교복을 준비해두듯 말이다. 그때는 아침마다 옷장을 열고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다. 옷이 많지만 옷이 없는 상황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간 입을 옷을 정하기로 했다.


아침마다 옷을 뭘 입을지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이다. 입을 옷이 없으면 속된 말로 멘붕에 빠진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것은 더 견딜 수가 없다. 아래가 이번 2020 가을 옷 착장이다. ppt로 오려 붙여 가며 7-8개 정도를 맞췄고 이렇게 돌려가며 입고 있다.  정리하고 보니 한 시즌에 입는 옷이 몇 벌 안되었다. 이렇게 옷 착장을 맞추고 나서 아침마다 차오르던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고 나와서 하루 종일 옷을 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졌다.




옷을 더 이상 사지 않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옷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옷이 많아야 하는 게 아니라 옷이 적당히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옷을 더 이상 사지 않기 위해서는 비우고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청바지 12벌 중에 늘상 입는 건 2벌 정도다. 고민하다가 2개만 일단 정리했다. 최근 블라우스를 하나도 안 입는데 블라우스가 7개 정도 있다. 2개를 정리했다. 2년 전부터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치마들도 모두 정리해서 재활용 통에 넣었다. 옷장이 가뿐해졌다.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았다. 아직 버리기에는 아까운 곳들은 일단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두었다. 올겨울까지도 안 꺼내 입으면 버릴 예정이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오히려 선택을 어렵게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채식 지향 식단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냉장고가 많이 정리되었다. 식재료에 대한 욕심도 많이 줄었다. 옷장도 비슷한 원리인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 본 기사에서 청바지를 만드는데 엄청난 환경적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뭐랄까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소비를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환경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평생 NGO에서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왔고 불과 작년에만 해도 케냐 나이로비에 살면서 쓰레기 밭에서 노는 아이들, 구멍 난 셔츠를 그대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던 나였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한잔도 모두 죄책감 덩어리이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걸로 마음을 정리한다. 내년 소비 단식 마칠 때까지 옷을 한벌도 사지 않는 것.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옷은 나누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걸로




소비단식일기 1~10 이 궁금하시면


https://brunch.co.kr/brunchbook/spendingfa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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