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들은 옷을 팔아 책을 산다고 합니다. 책이 의식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저는 반대로 책을 팔아 떡볶이도 사 먹고 빵도 사 먹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 TV가 없는 대신 책은 양껏 사주셨던 부모님 덕에 책벌레로 자랐습니다. 내향적인 성향과 집안 분위기가 잘 맞아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게 좋았어요. (이것은 좋기만 한건 아니에요. 공감능력이나 협동하는 법 같은 사회성을 기르는데 오래 걸렸거든요. 일례로 저는 단 한 번도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나 공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다만 수능에서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언어영역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어린날부터 쌓아온 독서의 덕을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헌책방을 좋아했어요. 낙성대 근처에 살았는데 그곳에 커다란 헌책방이 두어 군데 있었어요. 그 당시 보그를 좋아했는데 매달 새책을 사기에는 부담스러워 항상 과월호를 구입하기 위해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 특유의 보물창고 같은 분위기 책 냄새가 정말 좋았어요. 서점과 다르게 빽빽하게 쌓여있는 책의 산속을 헤매고 다니면 마치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메리 같았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헌책방을 뒤지며 좋아하지만 읽지 않는 원서들을 구입하곤 했습니다.
직장인이 되고 동네 헌책방들이 하나둘 없어져 찾을 수가 없어졌을 때, 알라딘 중고서점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홀린 듯 들어갔고 좋아하는 책들이 헐값에 나와있는 걸 보고 잔뜩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남편도 저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데이트 코스 마지막에는 항상 중고서점을 들렀습니다. 그 당신에는 책을 팔기보다는 주로 사러 방문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주기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시도했었고 재테크를 시도했었고 절약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어느 날 충동적으로 책을 지고 가서 판 돈으로 또 책을 사보기도 했습니다. 판 책을 그다음에 가서 도로 사온적도 있지요. 하지만 파는 것보다는 사는 양이 훨씬 많았고 북페어도 다니고 서점 데이트도 즐기다 보니 저희 집은 책을 더 이상 쌓아질 곳이 없어졌습니다. 어릴 적 책동굴처럼 보였던 아빠의 서재를 보고 자란 저는 원래 책은 그렇게 많이 쌓아두고 사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세월이 흐르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짐처럼 느껴지시자 점점 이것저것 줄이시더니 지금은 미니멀리스트가 되셨습니다. 책은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시고 꼭 읽고 싶은 책은 사서 깨끗이 보고 다른 분에게 드리곤 하십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왔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큰 비중이 "책"이었습니다. 실제적인 가격이 크지 않더라도 책 구입 횟수가 많았어요. 책은 사도사도 죄책감이 덜했거든요. 3개 서점 (예스 24, 알라딘, 교보)의 VIP 등급을 매월 유지하며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원래 책은 산 책 중에 몇 개 읽는 거라는 모 작가님의 말에 합리화를 하며 읽지도 않는 책들을 잔뜩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저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 저것도 읽어야 하는데 이것도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죠. 보통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책에도 관심이 가서 연쇄적으로 책을 사게 됩니다. 그렇게 산 책 택배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이의 책이 한두 번씩 쌓이고 쌓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여러 가지 진로가 틀어지면서 쉬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 북스타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아주 소박한 북스타그램을 운영하다가 요즘은 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리뷰를 위한 책 읽기가 되어버린 듯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북스타그램에 올리는 리뷰는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쓸 수 있습니다. 책 사진을 예쁘게 찍고 (이것도 좀 어려웠어요)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하고 약간의 생각을 올리면 되지요. 책 내용을 너무 많이 올리는 것도 저작권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인스타그램에서 인기가 있는 책들은 최근에 화제가 되는 책들, 작가님들이 인기 있는 책들이고 그런 책들이 좋아요를 많이 받곤 합니다. 아무튼, 리뷰를 위한 책 읽기, 리뷰를 위한 리뷰를 하다 보니 좀 지치기도 하고 저의 즐거움이 책 읽기가 재미가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북스타그램은 아주 간간히 하고 다시 내 즐거움을 위한 책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읽지 않을 것 같은, 북리뷰를 위해 샀던 책들을 모두 쌓아보니 수십 권이 되었습니다.
알라딘에서 책을 판매한 흔적들
백팩에 가득 짊어지고 버스를 탔습니다. 뒤로 넘어질 듯 무거웠습니다. 그간 내가 저지른 소비의 무게라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거의 새책이고 저는 책에 펼침 자국도 내지 않고 책을 보는 편이라 모두 최상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금 몇만 원을 손에 쥐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떡볶이를 배달시켰습니다. 친정엄마는 "아니, 누구는 옷을 팔아 책을 산다는데 너는 책을 팔아 떡볶이를 먹냐 하하하"하며 웃으셨습니다. 저도 책을 팔아서 떡볶이를 먹다니 하며 허허하고 웃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책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사고 있습니다. 일단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려고 하고 온라인 구독 서비스를 (ex. yes24북클럽,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 등)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쌓여있는 책이 많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걸 핑계로 동생에게 생일선물로 이북리더기를 받은 건 좀 반성하고 있습니다.
소비 단식을 하면 책도 사지 마! 보지 마! 이런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책을 구입하는 행위를 읽는 행위보다 더 좋아했던 것이 더 문제였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굿즈에도 홀랑 넘어가기도 해서 사고 싶지 않은 책도 필요할지도 몰라하며 산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 핫한 책은 사서 대충 읽고 북스타그램에 올린 적도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리뷰를 위한 리뷰. 책 읽기를 위한 책 읽기가 되어버린 거죠. 책 읽기 차체의 즐거움이 없어진 거예요.
욕심으로 쌓아 올린 책을 무너뜨리고 떡볶이와 바꿨습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쌓아 올린 책을 무너뜨리고 떡볶이와 바꿨습니다. 여전히 저는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잠자리 곁에 두곤 합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습니다. 메모도 안 하고 그냥 읽습니다. 그냥 책은 읽는 것 그 자체로 좋습니다. 조금씩 비워가는 책장을 보면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는 듯도 합니다. 다 읽고 나면 판매가 가능한 책은 팔고 소장하고 싶은 책은 두고 친구에게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제가 바라는 정도로까지 책장이 말끔해지려면 아마 시간이 더 걸리겠지요. 정말 제가 좋아하는 몇 가지 책으로 단출한 책장을 이룰 수 있다면 그때 더 평안할 것 같습니다.
000의 서재, 이렇게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작가님들의 엄청난 서재들이 나옵니다. 정말 부럽고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온 집을 책으로 채워야지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삶이 많이 안정되고 가족이 오래도록 살 집이 정해지면 서재를 잘 꾸려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정말 마음이 편안하고 기쁘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의 삶이 나그네 삶이 되면서 책을 이고 지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원하는 책 몇 권, 트렁크에 넣어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타고난 맥시멀 리스트인 저는 이렇게 정처 없는 삶은 인생이 저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정말 소중한 걸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죠. 옷도, 책도, 그 어떤 것이라도 순간 기쁨은 즐기되 내 삶을 무겁게 하지는 말아야지 생각합니다.
단식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디톡스가 되듯 소비 단식을 하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