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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Dec 18. 2020

올해는 다이어리를 사지 않기로 했다.

소비 단식일기 (16):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비에 관하여

Photo by Estée Janssens on Unsplash


중고등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매년 사던 다이어리를 올해는 사지 않기로 했다. 매년 11월이 되면 서점의 문구코너에는 고운 색의 다음 해 다이어리들이 진열되고는 한다.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고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는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1+1 행사도 진행하기에 마음에 드는 제품은 2개씩 거머쥐기도 하고 하나는 독서용 하나는 일상용으로 써야지 마음먹기도 했다.


작년에는 3개의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프랭클린 플래너

로이텀 불렛 저널

일러스트 다이어리 (이건 심지어 1+1)    


로이텀 불렛 저널, 프랭클린 플래너, 일러스트 다이어리 (왼쪽부터)


불렛 저널은 다행히 나와 잘 맞아서 열심히 사용했다. 지금은 3번째 불렛 저널을 사용하고 있지만 나머지 다이어리들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어느 해인가 인터넷 서점에서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하면 다이어리를 준다기에 몇 번이고 끊어서 결제해서 총 3개의 다이어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렇게 다이어리를 사고도 모자라서 6-7월이면 슬금슬금 질려서 만년 다이어리를 새로 사서 적고는 했다. 당연히 그전에 쓰던 다이어리는 버림받는다. 스타벅스를 사랑했던 나로서 다이어리 프리퀀시를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매년 2-3개를 받아서 주위에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사실 몰스킨 다이어리는 먼슬리 부분이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나와는 잘 맞지 않아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독서 다이어리나 일기장으로 써야지 하며 사모았었다.


최근에 방을 정리하다가 1/3도 다 사용하지 못한 다이어리&플래너가 여러 권 나와 깊이 반성하며 뜯어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 쓰고 있는 불렛 저널과 아직 쓰지 않은 노트를 챙겼다. 내년도 1월 달력을 그렸다. 사실 올해 하반기부터는 핸드폰에 스케줄을 입력하니 편하고 알림도 해줘서 좋아 계속 그렇게 쓰고 있다. 저널에는 정말 하루 마무리를 적거나 독서하거나 뭔가를 보거나 글감을 적고는 했다. 사실 그마저도 요새는 글을 쓰다 보니 에버노트에 적어야 나중에 검색이 쉬워서 노트에는 거의 적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일을 할 때도 그때마다 구글 캘린더에 입력을 하는 편이 공유하기도 좋고 리마인더도 잘 되어서 그렇게 하곤 한다.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사실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어떤 다이어리를 살까 고르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서점의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다이어리를 펼쳐보고 구입하고 김에 새 펜도 예쁜 걸로 하나 사고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도 사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물론 그렇게 고르고 결제할 때 너무 가격이 높아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1년 동안 사용하는 거니까 매달 5-6천 원인걸 뭐라며 자신을 합리화하곤 했다.


한 달에 5-6천 원이면 커피 한잔 가격이지
커피 한잔 안 마시면 되지라며 슬쩍 넘어가곤 한다.


어디서 봤는데 부자들은 곱하기로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나누기로 생각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매년 5-6만 원이면 10년이면 5-60만 원이고 20년이면 100만 원이 넘는 돈을 다이어리에 사용하게 된다. 물론 누군가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들을 더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는 줄곧 한 달에 5-6천 원이면 커피 한잔 가격이지 커피 한잔 안 마시면 되지라며 슬쩍 넘어가곤 한다. 이것이 다이어리 하나라면 당연히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습관은 내가 대부분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 것들을 구매할 때 사용하는 생각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캐논 인스픽도 엡손 라벨 기계도 구입했다. 할부로 코트도 사고 책도 몇십 만원씩 산다.


또한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습관적으로 구매하고 있는 것들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스티커, 포스트잇, 특히 스누피가 붙어있는 것들: 이 정도면 사도 되지 뭐라며 사모은 스티커들이 박스 하나 가득이다. 그만 사자 그만. 다이소만 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반성 반성.    

계절마다 하나씩 사는 에코백: 안 사려고 노력하는데 1년에 2개씩은 사는 것 같다. 반성중     

여름 티셔츠: 여름이니 티셔츠를 사야지라며 그 해 유행하는 티셔츠는 꼭 3-4장은 산다. 가격이 얼마 하지 않으니 죄책 감 없이 산다. 반성     


사는 품목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가격이 비싸지 않다. 저렴하다고 하긴 좀 어렵고 암튼 엄청 비싸지 않으니 사는데 고민이 더 없어진다.     

 예쁘다. 매년 매 시즌 새로운 상품들이 나오고 다 정말 예쁘다.     

 자주 사용하는 것들이다. 사놓고 안 쓰는 게 아니라 사면 당장 사용한다. 물론 예전에 쓰던 것은 어디 장에 잘 넣어둔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 몇 달 꺼내서 쓴다.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 예쁘고 자주 사용하는 것들은 역시나 지갑이 쉽게 열리는 품목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주는 물건들이다. 마치 달콤한 커피 한잔 같은 것들이다. 금방 기분을 즐겁게 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큰 카드값으로 돌아온다. 소소한 기쁨들이 큰 카드값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소소한 기쁨이 큰 카드값으로 돌아온다


인터넷에서 소소하게 먹을 것들을 천 원 오천 원 쓴 것 같은데 카드값은 1억쯤 되는 것 같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만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라니 반갑기도 하다. 저축은 티끌모아 티끌인 것 같은데 소비는 티끌모아 태산이 된다. 어떤 심리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찌 되었든 적은 금액의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텀블러를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이미 빈 노트들도 많이 있어서 다이어리도 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에코백은 정말 양심이 있다면 더 이상은 사지 말아야 한다. 에코백 재질로 되어있는 백팩이 너무 사고 싶은데 허벅지를 찌르며 참고 있다. 스티커는 말할 필요 없이 산더미 같고 포스트잇도 뜯지도 않은 것들도 이미 많이 있다.

 

스티커들, 이만큼이 한 박스 더 있다
올해 구입한 에코백, 검은색은 못 찾겠다


하지만 지금 스타벅스커피도 끊은 마당에 (코로나로 인해 카페에 못 가면서 이건 자연스럽게 잘 지켜지고 있다) 뭔가 소소한 기쁨을 주는 것들을 단번에 없애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하긴 하다. 물론 예전에는 교보문고에서 문구들을 잔뜩 사서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잔뜩 펼쳐놓고 커피와 베이글을 먹었다. 약 7-8만 원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사실 소소하지 않은)이라는 명목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활동을 하되 금액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은 교보문고는 다이소로 스타벅스는 집에서 조금 비싼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사실 소비 단식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문구류를 몇만 원씩 사는 것은 줄어들었다.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이 많이 없기도 했고 '이 돈이면 다음 주에 장을 한번 보겠네'라는 마치 주부 9단 같은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보문고는 다이소로
스타벅스는 집에서 조금 비싼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사실 이 글을 적어두고도 며칠을 업로드할지 말지 고민했다. 글을 올리고 나면 정말 올해는 다이어리를 사지 못할 테니까 망설여졌다. 글을 저장해 두고 계속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가 나타나면 사고 글은 그냥 삭제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에 몇 번씩 검색을 해도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노트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글을 올리고 올해는 정말 다이어리를 사지 말자고 결심했다.


소소한 기쁨을 주는 것들을 절대 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 아실 거라 믿는다. 나도 언젠가 소비 단식이 안정화되고 지금 가진 노트와 다이어리도 다 사용하고 안정적인 소비와 저축을 하게 되면 예산을 정해서 예쁜 다이어리를 사고 싶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이어리와 스티커를 사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줄어가는 대출금과 카드값을 보며 느껴지는 안도감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이어리와 스티커를 사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줄어가는 대출금과 카드값을 보며 느껴지는 안도감이다.


예전에 카드값을 외면한 채 마구 소비하던 나는 낭떠러지 절벽길을 눈을 감고 걸어가며 거기서 오는 아찔함을 즐기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지금은 다행히 한 계단씩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어디 산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이 산을 내려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들판을 걷게 되고 그곳에서 오는 안정감을 기쁨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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