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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Nov 03. 2020

안녕 스타벅스 그동안 고마웠어요

소비 단식일기 (12): 스타벅스를 끊으며

Photo by Charles Koh on Unsplash


이제 더 이상 스타벅스를 가지 않기로 했다.


스타벅스를 다닌 지 20여 년의 시간을 정리하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대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었다. 친한 언니가 데려가 줬는데 처음 마셔보는 고소한 라테 맛과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그 후로 나는 스타벅스의 충성고객이 되었다. 집에서 멀었음에도 가끔 친구를 데려가 커피를 마셨다. 이후 어학연수를 가서도 스타벅스를 보면 고향처럼 반가워하며 들어가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영국에서 아이스커피를 구하기는 너무도 어려웠기에 ㅋ) 친구들을 만나면 의례 스타벅스에서 수다를 떨었고 선물은 죄다 텀블러를 사서 주었다. 지금은 한 개 빼고 다 정리했지만 텀블러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겨울이면 나오는 다이어리도 2개나 쉽게 얻을 정도로 겨울 시즌에 양껏 마셔대곤 했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는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시청역 뒤쪽에 우리은행 건물 1층에 있는 곳에서 오픈 담당으로 일했었다. 3개월간 일하며 제일 좋은 건 매일 2잔씩 주어지던 서비스 커피였다. 메뉴에 없는 다채로운 음료를 만들어서 먹고 친구들이 오면 한잔씩 내어줄 수 있었다. 단골손님들을 기억해서 음료를 내어드리고 스타벅스 파트너 (직원을 파트너라고 불렀다)에 궁금한 것이 많던 손님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우유 폼이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지면 왠지 뿌듯했다. 나는 특히 포스(POS)를 잘 봐서 점심시간 후 가장 붐빌 때 투입되기도 했었다. 같이 일하던 직원들과 롯데월드도 가고 곱창도 먹으러 가고 그랬는데.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좋아한 건 매장에 흐르는 음악과 분위기, 조명, 그리고 친절한 직원들이었다. 여러 가지 커스텀이 되는 커피도 좋았다. 아침에 베이글과 크림치즈, 그리고 오늘의 커피를 한잔 놓고 앉아 있으면 온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커피 원두의 나라인 케냐에서 돌아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스타벅스였다 (커알못). 매년 골드회원을 갱신하는 내가 (물론 나보다 더 쓰는 VIP들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써야 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마어마하게 써야 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돈이 많지는 않다) 이제 스타벅스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마지막 별쿠폰으로 마신 토피넛 라떼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비 단식에 더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이다. 나에게 그동안 많은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고 경력이 되었던 그곳이지만 가게 되면 적게는 몇천 원에서 만원 넘게까지 사용하는 그곳을 끊지 않고서는 더 이상 소비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가서 브런치를 시키면 몇만 원은 훌쩍 넘기는데 사실 아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가는 곳이다. 아이는 투썸 마카롱을 더 좋아한다. (ㅋ)


나에게 스타벅스는 소비를 여는 열쇠


나에게 스타벅스는 소비를 여는 열쇠 같은 것이다.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되는 커피를 습관처럼 마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카드로 뭔가를 결제하게 되었다. 항상 소비를 줄일 때 스타벅스를 가장 먼저 끊었는데 하다가 안돼서 스타벅스를 가게 되면 그 후로 카드값은 급격히 늘어났다. 몇만 원 내로 줄이는 것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뭐든 줄이는 것보다 끊는 게 더 쉽다. 줄이는 것은 강한 의지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물론 스타벅스 커피맛과 분위기에 최근 물린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우리 동네 스타벅스 한정인듯하고 또 시내에 나가면 제일 편한 곳은 스타벅스이긴 하다. 아무튼, 나는 이제 스타벅스를 가지 않으려 한다. 스타벅스 카드에 충전되어 있는 약간의 금액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게 된다면 사용하기 위해 남겨두었다.


집에는 커피믹스와 원두가 있고 근처에는 다시 문을 연 도서관이 있다. 집중이 잘 안되긴 하지만 집에서도 커피 마시며 글을 쓸 수 있다. 역시 소비 단식을 위해서는 집에 있는 편이 더 좋다. 혹시라도 너무너무 사제 커피(?)가 마시고 싶어도 스타벅스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 다시 별을 모으고 싶어 질 테니까. 그냥 포인트 적립이 가능한 투썸이나 친근한 이디야에 가려고 한다. 그동안 스타벅스에서 읽은 책만 수백 권, 써낸 보고서와 논문도 수십 편 될 것이다. 써낸 글과 이야기. 친구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 2가 안쪽에 있던 커다란 2층짜리 매장에서 친구와 만나 목이 아프도록 수다를 떨던 날이 생각난다. 눈발이 휘날리던 유리 밖을 내다보며 나누던 이야기들은 아직도 남아 나를 이루고 있다.


고마웠어요. 스타벅스. 그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고마웠어요. 스타벅스. 그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언젠가 내가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늘 번창하시길 건승하길 바랍니다.


안녕.






그간의 소비단식일기가 궁금하시면


https://brunch.co.kr/brunchbook/spendingfa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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