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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Apr 01. 2021

하수구와 아보카도

때로는 삶이 우릴 실망시킬지라도

Photo by René Cadenas on Unsplash


나이로비로 오기 전, 1월의 일이다. 


친정집 욕실 바닥의 하수구가 막혀 버렸다. 자주 막혀서 정기적으로 뚫는 액체를 부어두곤 하는데 더 잘 뚫어보겠다고 과탄산소다를 잔뜩 부었는데 꽉 막혀버린 것이다. 욕실에 물이 안 내려가서 바다처럼 물이 가득 찼고 아이는 이제 물고기가 오면 어떻게 하냐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세탁소 옷걸이를 풀어서 그걸로 하수구를 쑤시기 시작했다. 아무리 쑤셔도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꽉 막힌 게 내 인생 같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뚫지 못하고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콸콸콸 하고 물이 빠지더니 이전보다 더 물이 잘 내려간다고 엄마가 이야기해주셨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물 이제 잘 내려가.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은 말을 잇지 않으셨지만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엄마 집에서 지낸 지 벌써 1년, 아무것도 안 하는, 아니 여기저기 원서를 내지만 떨어지기만 하고 코로나로 집에만 있는 딸을 보며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도 나중에 아이가 자신만의 문제로 괴로워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아직 상상이 안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엄마가 나를 큰소리로 불렀다. 


"이리 와 봐 이리 와봐 싹이 났어 싹이"


다가가 보니 엄마의 책상 옆에 있는 커다란 화분 옆에 놓아두었던 아보카도에서 한 뼘도 더 되는 아보카도 싹이 나온 것이다. 아보카도를 한참 먹을 때가 있어서 씨가 많았는데 물에 담가두면 싹이 나온다고 해서 한참 둬도 싹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3-4개만 화분 흙에 그냥 두고 나머지는 버렸었다. 김영하 작가의 인스타에서 그냥 씨를 던져뒀더니 싹이 나더라는 이야기를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싶었다. 


무심하게 화분에 던져두길 3달도 넘었었다. 사실 1-2주간은 매일같이 들여다봐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거름이라도 되겠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싹이 나오다니.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한 뼘이나 자라고 자그마한 잎사귀도 달고 말이다. 너무 놀라 한참을 보다가 울어버렸다.


그래 괜찮아
아보카도는 씨가 갈라지고 싹이 나오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리지 
분명 내 삶에도 걸어갈 길이 반드시 보일 거야 



그렇게 아보카도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얼마 후 나이로비로 돌아가는 일정이 결정되고 취업도 하게 되었다. 


(좌) 아침으로 먹는 아보카도 설정샷 (우) 아침의 바나나 나무


하나에 100원도 채 하지 않는 아보카도를 먹으며 아침을 열곤 한다. 케냐에서 먹은 아보카도는 달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보카도는 단맛이 있는 과일이었다. 그냥 아무 맛도 없는 고소함으로 먹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은은한 단맛에 놀란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훨씬 풍성한 수분에 매일 감탄하곤 한다. 


아침이 밝았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려고 늘 애쓰고 있다. 내게 더운 나이로비에서 유일하게 뭐라고 걸쳐야 하는 새벽녘을 사랑하게 되었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커피를 내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삶은 언제나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고 내 뜻과 목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답답했지만 이제는 좀 즐겨보려 한다. 그동안 냉소적인 글을 쓰다가 이렇게 환경이 좋아지고 나서야 "아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말하는 내가 좀 웃기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좋은 때는 기쁘게 감사하게 또 힘이 들면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은 아름다운 인생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평안을 만끽하려 한다.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 상자는 너무도 좋지 않은가. 때로는 실망스러운 것들이 나오지만 그래도 언젠가 반드시 좋은 것이 일어난다는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 


감사함으로 온전한 기쁨으로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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