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삶이 우릴 실망시킬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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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로 오기 전, 1월의 일이다.
친정집 욕실 바닥의 하수구가 막혀 버렸다. 자주 막혀서 정기적으로 뚫는 액체를 부어두곤 하는데 더 잘 뚫어보겠다고 과탄산소다를 잔뜩 부었는데 꽉 막혀버린 것이다. 욕실에 물이 안 내려가서 바다처럼 물이 가득 찼고 아이는 이제 물고기가 오면 어떻게 하냐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세탁소 옷걸이를 풀어서 그걸로 하수구를 쑤시기 시작했다. 아무리 쑤셔도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꽉 막힌 게 내 인생 같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뚫지 못하고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콸콸콸 하고 물이 빠지더니 이전보다 더 물이 잘 내려간다고 엄마가 이야기해주셨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물 이제 잘 내려가.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은 말을 잇지 않으셨지만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엄마 집에서 지낸 지 벌써 1년, 아무것도 안 하는, 아니 여기저기 원서를 내지만 떨어지기만 하고 코로나로 집에만 있는 딸을 보며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도 나중에 아이가 자신만의 문제로 괴로워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아직 상상이 안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엄마가 나를 큰소리로 불렀다.
"이리 와 봐 이리 와봐 싹이 났어 싹이"
다가가 보니 엄마의 책상 옆에 있는 커다란 화분 옆에 놓아두었던 아보카도에서 한 뼘도 더 되는 아보카도 싹이 나온 것이다. 아보카도를 한참 먹을 때가 있어서 씨가 많았는데 물에 담가두면 싹이 나온다고 해서 한참 둬도 싹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3-4개만 화분 흙에 그냥 두고 나머지는 버렸었다. 김영하 작가의 인스타에서 그냥 씨를 던져뒀더니 싹이 나더라는 이야기를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싶었다.
무심하게 화분에 던져두길 3달도 넘었었다. 사실 1-2주간은 매일같이 들여다봐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거름이라도 되겠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싹이 나오다니.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한 뼘이나 자라고 자그마한 잎사귀도 달고 말이다. 너무 놀라 한참을 보다가 울어버렸다.
그래 괜찮아
아보카도는 씨가 갈라지고 싹이 나오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리지
분명 내 삶에도 걸어갈 길이 반드시 보일 거야
그렇게 아보카도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얼마 후 나이로비로 돌아가는 일정이 결정되고 취업도 하게 되었다.
하나에 100원도 채 하지 않는 아보카도를 먹으며 아침을 열곤 한다. 케냐에서 먹은 아보카도는 달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보카도는 단맛이 있는 과일이었다. 그냥 아무 맛도 없는 고소함으로 먹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은은한 단맛에 놀란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훨씬 풍성한 수분에 매일 감탄하곤 한다.
아침이 밝았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려고 늘 애쓰고 있다. 내게 더운 나이로비에서 유일하게 뭐라고 걸쳐야 하는 새벽녘을 사랑하게 되었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커피를 내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삶은 언제나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고 내 뜻과 목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답답했지만 이제는 좀 즐겨보려 한다. 그동안 냉소적인 글을 쓰다가 이렇게 환경이 좋아지고 나서야 "아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말하는 내가 좀 웃기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좋은 때는 기쁘게 감사하게 또 힘이 들면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은 아름다운 인생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평안을 만끽하려 한다.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 상자는 너무도 좋지 않은가. 때로는 실망스러운 것들이 나오지만 그래도 언젠가 반드시 좋은 것이 일어난다는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
감사함으로 온전한 기쁨으로 하루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