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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Jul 30. 2020

소비하지 않음의 기쁨

소비단식일기 (5): 소비 요정의 단식일기

Photo by Peter Conlan on Unsplash


처음 소비 단식 책을 봤을 때, 어디 재테크 책인지 카페에서 본 무지출 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돈을 쓰지 않은 날이라는 뜻인데 처음에 나는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돈을 안 쓰면 되지. 그게 뭐가 대수냐 싶었다. 하지만 나 같은 소비 친화적 인간에게 이건 정말 어려운 날이었다. 당장 필요해서 큰일 나는 것들 (쌀, 비누, 요리용 기름 같은) 것들은 메모를 해두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장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평일에 웬만하면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 다이어리 꾸미기 한다고 몇만 원어치를 사둔 스티커를 뒤져서 무지출 데이를 달성하는 날 스티커를 붙여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좀 쉽게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돈 쓸 일이 생겼다.  아이와 산책을 하다가 목이 마르다고 했다. 지갑 하나만 들고 나왔는데. 결국 편의점에서 물을 사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쓰다가 의식하고 나니 쓸데없이 돈이 나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와 산책을 할 때는 꼭 물을 챙기게 되었다. 


외출을 해서 약속 장소로 가다가 보니 입술이 말랐다. 립밤을 안 가져왔다. 입술이 다 벗겨지려고 했다. 예전 같으면 얼마나 한다고 라며 올리*영에 들어가서 3000원짜리 니*아 립밤을 하나 샀을 것이다. 꾹 참고 집에 돌아와 코트며 패딩 옷 주머니를 다 뒤져보았다. 똑같은 립밤이 3개나 나왔다. 반성을 했다. 나가기 전에 잘 보이는 곳에 립밤을 하나 두었다. 뭐든 미리 준비하고 생각해야 무지출 데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탄산수 하나를 사 마시고 싶은 마음도 잠시 참아야 한다. 집에 가면 탄산수 있으니 조금만 참자하며 말이다. 사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다가 옷이 맘에 안 들면 옷을 사서 새로 입고 가는 사람이었다. 신발도 새로 사서 신은 적도 있고 향수를 새로 사서 뿌린 적도 있다. 여름에 옷색에 맞추려고 무지개색 우산을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다 (...) 소비 요정이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나. 



Photo by Daniel Kempe on Unsplash


그렇게 무지출 데이를 처음으로 경험한 날 스티커를 붙이며 실실 웃음이 나왔다. 박사학위 졸업장을 받을 때만큼 기뻤다. 이게 뭐라고.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성과였다. 이번 달에는 몇 개의 스티커를 붙일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비를 미룰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차피 살 거 빠르게 사자는 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그런 항목들도 있다. 새로 바꾼 유모차라던가 보송보송한 잠옷 바지는 단숨에 내 삶의 질을 올려놓았다. 왜 이걸 이제 샀다 싶었다. 소비 요정은 이럴 때 참 기쁘다. 하지만 당장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리스트를 적어두고 일주일에 한 번에 몰아서 샀다.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한 번에 결제하는 기쁨이란! 결제의 기쁨에 무지출의 기쁨이 더해졌다. 기쁜 날들이 늘어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소비의 기쁨보다 더 큰 쓰지 않는 기쁨이 필요하다. 


스티커로 표시한 무지출데이! (2020.03)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명품백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자존감이 커지고 통장에 쌓여가는 돈을 계속 보면 쓰지 않는 기쁨이 내 몸에 체화될까. 디올 레이디백이 더 이상 가지고 싶어 지지 않을까. 소비 요정이 절약 요정으로 변해갈 수 있을까. 몇 가지 규칙이랄지 더 적어보았다. 


- 생필품 사는 요일을 정한다. (금요일 오후에 장을 보기로 했다)

- 아이와 외출할 때 물, 음료수, 간식을 꼭 챙겨나간다. 

- 혼자 외출할 때도 물과 주전부리를 챙겨나간다. 


<3주 차 일기>

1일_딸기 사는데 10000원을 썼다. 채소 과일은 아직은 재래시장이 더 싼 것 같다. 현금 영수증이 되면 좋겠지만 할머니들께 현금영수증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남편 월급이 적어서 연말정산에서는 항상 상당액을 돌려받는다. 아껴 쓰는 게 더 남는 거겠지. 

2일_그동안 맹렬하게 냉장고를 파먹었는데 이제 우유와 계란도 없고 아이 간식을 몇 가지 샀다. 다행히 우수고객 쿠폰들이 남아 있어서 무료배송도 되고 7% 할인도 받았다. 예이! 

3일_두 번째 무지출 day! 카드를 여러 개로 나눠놓으니 은근히 헷갈린다. 아이와 내용 돈, 생활비 이렇게 3개로 나눠져 있는 게 불편하다. 장을 보면서 내 물건과 아이 간식도 사기 때문에 그냥 모든 돈을 생활비로 몰기로 했다. 이렇게 하는 게 잘하는 건지는 또 결산을 해보면 알겠지. 

4일_엄마의 생일이었다. 경조사비로 따로 떼어놓은 돈으로 행사를 치렀다. 오랜만에 형제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좋았다. 아이가 가지고 싶어 하는 앱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안 사준다고 했더니 할머니에게 1시간을 졸라서 받아냈다. 돈은 큰오빠가 냈다. 누군가에게 빌붙으며 소비 단식이 진행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여유 있게 돈을 사용해야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조를 때는 안된다고 단호박처럼 이야기해야겠다. 

5일_친정부모님과 남이섬에 다녀왔다. 부모님이 아이와 함께 나가고 싶어 하셔서 바람을 쐬러 사람 없는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비상금으로 놔둔 5만 원 현금을 챙겨서 나갔다. 점심은 엄마가 사주었고 유류비는 아빠가 내주었다. 나는 입장료와 간단한 간식을 샀다. 비상금을 가지고 있던 건 잘한 것 같다. 좋은 하루였다. 약간 긴장감을 가지고 얼마나 있고 얼마나 쓰는지 남은 건 얼마인지를 알고 있는 건 좋은 것 같다. 예전처럼 카드값 합산이 두려워 문자도 확인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잔액을 확인하는 건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6일_병원에 다녀왔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지난 몇 주간 어떻게 지냈는지 상세히 설명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는 하였다. 그리고 보통은 약을 늘려야 했기 때문에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2월 중순부터는 약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나니 꽤나 기분이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병원 다녀오는 날에는 책도 한 권 사고 외식도 늘 했다. 그러지 않고는 아이를 만날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오늘은 기운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스타벅스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글을 썼다. 노트북을 펴고 인터넷 서핑도 하지 않고 맹렬하게 글을 썼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후루룩 먹고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스타*스는 예전에 남동생에게 선물 받은 기프트카드를 아껴 쓰고 있다. 다음에 혹시 누가 선물 준다고 하면 꼭 스타*스로 받으리라). 

7일_세 번째 무지출 데이!! 알*딘에 중고책을 팔러 나갔다. 나는 책을 많이 산다. 2개의 온라인 서점의 우수고객이다. 한 보따리 팔고 나니 7만 원도 넘는 돈이 생겼다. 중고책을 2권 구입하고 아이 줄 젤리를 하나 사서 돌아왔다. 무지출도 모자라 오늘은 플러스된 날이다. 플래너에 +라고 적었다.


'왠지 알뜰한 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엄마처럼 매일 가계부를 쓰게 될 날이 올 것 만 같다' 

이후에 닥쳐올 어마어마한 사태를 모르고 나는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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