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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Jul 28. 2020

나는 우울할 땐 카드를 긁어

소비단식일기 (4): 우울과 소비의 상관관계

Photo by Tengyart on Unsplash


내 카드값 500을 대면할 시간이 왔다.

어디다 썼는지 알긴 알아야 하지 않겠나. 도저히 카드 명세서를 열어볼 수가 없다.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한다. 눈을 딱 감고 카드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손이 덜덜 떨린다. 비밀번호를 넣고 3월 카드 내역을 보고 다운로드하였다. 몇십 장 나올 줄 알았는데 3장 정도 됐다.

총액수는 4,829,975만 원
공포의 카드내역서


"미쳤어"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알아보자. 대학원 다니며 배운 그림실력을 발휘해 보도록 한다. 다행인인지 불행인지 2-3월 한 달에 왕창 500만 원을 쓴 건 아니라는 거였다. 10월부터 이어져온 할부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자랑이 아니다. 물론 2월에 결제된 액수도 어마어마하긴 하다. 그럼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도 좀 보도록 하자.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내 이야기 같지 않고 남 얘기 같아서 마음이 의외로 편하다 (그러라고 정리하는 게 아닐 텐데?).


카드값 500의 주요 지분의 크게 5가지 정도이다.
- 졸업기념으로 산 노트북
- 도서관이 코로나로 인해 안 열어서 산 책들
- 코로나로 인해 집에만 있어서 산 식재료 및 배달 음식비
- 각종 할부금의 누적
- 옷은 왜 이렇게 많이 산건가


1) 나에게 주는 선물: 노트북

졸업기념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서피스 프로)을 산 게 카드값의 반을 차지한다. 노트북이 이미 2개나 있으면서 샀다. 아이패드도 2개나 있는데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샀다. 그래서 포토샵도 사고 서피스 펜도 샀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지금 내 프로필 사진이다 (...)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걸 많이 사는지도 정리하고 있다 (라벨기라던가 포토프린터라던가...)


2) 인터넷서점을 도서관처럼 (?)

책은 죄책감없이 구매하는 내역 중의 하나인데 이렇게 많이 산 줄은 몰랐다. 이 당시에 도서관이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서점을 도서관처럼(?) 이용했다. 또한 도서관 책은 누군가가 손상시켜서 물어준 적도 몇 번 있어서 사서 편하게 보는 걸 선호하기도 한다. 그래도 한 달에 30만 원씩 쓰면 어쩌나.


3) 의외로 낮은 엥겔지수

식재료 및 외식비용이 70만 원인 건 생각보다(!) 적었다. 정말 한 150만 원 될 줄 알았다. 식재료 욕심이 정말 많다. 신혼 초에 가정경제를 파탄 낸 것도 다 식재료 욕심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다채로운 버터와 치즈, 그리고 와인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4) 할부의 유혹

할부금이 매달 50만원을 육박한다. 무이자 할부로 안사면 왠지 손해인 것 같은 심리가 엄청 위험하다고 많은 재테크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고도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5) 옷은 왜 샀나

입고 다닐 때도 없으면서 왜 11번째 청바지를 샀는지, 코트랑 패딩도 있으면서 무스탕은 왜 샀는지, 7번째 줄무늬 티셔츠를 왜 샀는지 모르겠다.


다 정리하고 보니 왜 샀는지 모르겠는데 참 많다. 저렇게 산 책과 옷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정엄마가 내역서를 볼까 봐 얼른 구겨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다니는 차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미친 게 아니라 우울한 거야

   

그렇다. 감정과 소비는 매우 밀접한 상관이 있다 (갑자기?). 쇼핑 중독자의 대부분이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Müller, 2019) (나는 치밀하게 카드값 500을 설명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구매-쇼핑 장애(Buying-shopping disorder: BSD)라는 용어가 있다. 이 현상은 쇼핑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고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BSD증세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으며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구매한다. 그들의 초과적인 구매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를 들면 기쁜 일이 생겼거나 나쁜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 혹은 자기 불일치 (self-discrepancy)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자제력 (Self-regulation)이 안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게 되어도 과잉 지출을 계속하며, 물건을 병적으로 모으게 된다. 많은 경우에 횡령 등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정신병리학적 증세가 나타난다. 최근의 분석은 BSD 발생 비율은 약 5%로 보고 있다. 현재 BSD는 정신건강상태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최근 국제 질병분류 ICD-11의 11번째 개정판에서는 현재 임시 범주에 BSD를 나열하고 있다. 특히 전자상거래가 중요한 쇼핑환경을 제공하면서 전통적인 BSD는 증가할 수 있다. 온라인 쇼핑은 즉각적인 보상, 긍정적인 정서 등에 기대치를 충족시킨다. BSD는 도박 장애 및 게임장애와 유사한 행동 정신병리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 (Müller, 2019)
과한 쇼핑은 대부분 과한 스트레스에서 온다


그렇다. 과한 쇼핑은 대부분 과한 스트레스에서 온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다 쇼핑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밝힌 것과 같이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을 해야 하는데 BSD의 경우 쇼핑으로 해결을 하는 것이다. 폭식이나 게임, 도박중독도 같은 범주에 있다. (나는 약간의 폭식 증세도 있다). 감정조절은 자기 절제(self-regulation)이라는 넓은 개념에 포함된다. 감정, 행동, 동기(motivation)가 모두 포함된다. (출처: Bronson, M. (2000). Self-regulation in early childhood: Nature and nurture. Guilford Press.) 그리고 이러한 자기 절제 능력은 어린 시절 (대부분 만 3-4세)에 대부분 형성된다. 오은영 박사님이 쓰신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라는 책도 이러한 개념에 기반해 있다.


시발 비용


많은 직장인들이 '시발 비용'이라고 사용하는 것도 다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화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소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감정조절에 미숙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 절제 능력은 체력이나 돈처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 회사나 학교에서 모두 다 사용하고 나면 집에서는 쓸 수 있는 게 남아 있지 않다 ( Schmeichel, 2008). 밖이나 회사에서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집에서 난폭해지는 경우도 이런 경우다. 육아로 지친 사람들이 쉽게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은 우울한 감정만 조절이 안 되는 게 아니다. 즐거운 감정도 조절이 안된다. 즐거워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퍼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나는 특히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부자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모습들을 보면 급격히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쇼핑앱을 연다. 뇌 속에 한 부분이 마비가 되는 걸 느낀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물건을 고르고 계산한다. 박사과정 중에 일이 잘 안 풀릴 때, 남자 친구와 싸웠을 때 쇼핑을 했다. 육아 중에, 퇴근해서 집으로 가기 전에 너무 힘들어 백화점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또 즐거운 감정이 휘몰아칠 때도 쇼핑을 한다. 내가 아주 오래도록 기다리고 바라왔던 저널에 논문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는 달에도 역대급 카드값을 경신했었다.


Photo by Sydney Sims on Unsplash


아빠 엄마 때문은 아니에요


이런 감정조절 능력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보살핌 하에서 배우고 기르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부분은 많은 경우 애착(attachment)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 있다. 즉,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쇼핑을 하는 BSD 증세를 보이는 것은 다 부모님이 나를 잘못 키워서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제 내 나이는 부모님이 어떻게 키웠든지 상관없이 나 자신의 어떠함을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할 때이다. 지금까지 부보님 탓을 하며 사는 건 옳지 않다. 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십수 년이 지났고, 부모님의 양육으로 살아온 날들 보나 내가 혼자 결정하며 살아온 날들이 더 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오래도록 나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순간 나를 최선을 다해 키웠고 그분들의 실수는 그분들에게 기억나지 않는 바쁜 일상의 조각뿐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이제 와서 사과를 한다고 한들 이미 나의 어린 시절의 무늬는 빛바랜 지 오래이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나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 최선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약을 다시 좀 늘려야겠어요


2주에 한 번씩 진찰받는 정신의학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카드값이 늘어가는 동시에 나는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잘 줄여가고 있었던 항우울&불안제를 다시 증량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시 수면제도 처방받았다. 수면제를 다시 처방받는 건 정말 싫었다. 하지만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을 붙잡고 있다가 쇼핑앱을 여느 니 잠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친 게 아니라 우울했다



참고문헌:

Bronson, M. (2000). Self-regulation in early childhood: Nature and nurture. Guilford Press.

Müller, A., Steins-Loeber, S., Trotzke, P., Vogel, B., Georgiadou, E., & de Zwaan, M. (2019). Online shopping in treatment-seeking patients with buying-shopping disorder. Comprehensive Psychiatry, 94

Schmeichel, B. J., Volokhov, R. N., & Demaree, H. A. (2008). Working memory capacity and the self-regulation of emotional expression and experien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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