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신입 마케터 일기 (2): 이 나이에도 처음 하는 일이 있다니
40살 신입 마케터가 되었다.
교수나 연구자가 될 줄 알았는데 마케터가 될 줄이야. 마케팅은 나와는 잘 안 맞는 옷이라 여겼다. 뭔가 옷도 잘 입고 SNS도 활발히 하고 얼리어답터에 좀 간지(?)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다. 전 회사의 마케팅팀은 뭐랄까 우리 층과 옷색도 좀 다르긴 했다. 우리는 면바지에 맨투맨에 컨버스를 입은 자들이 대부분이라면 마케팅팀이 있는 층에는 분들은 풀메이크업에 힐을 신고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으며 남성분들은 세련된 셔츠에 면바지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우리 층에서는 주로 빵과 떡볶이 냄새 같은 게 난다면 마케팅층에서는 향수 냄새가 났다. 마케팅 & PR (다르고 비슷하지만) 팀의 경우 연예인 출신들도 많이 있었고 외부 미팅이 있는 날에 소형차 한 대 값을 몸에 걸치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명품 브랜드에 계셨던 분들도 많이 계셔서 그런지 더더욱 화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같이 협업할 일이 있어서 미팅을 하면 묘하게 예리하고 날카롭달까 암튼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마케팅이라니.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마케팅 리드를 만나 면담을 하는 날, 아 여기는 좀 다른 곳이군 했다. 맨투맨에 면바지 그리고 두꺼운 안경에 부스스한 머리. 다만 안경 뒤로 빛나는 눈빛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도 항상 같은 룩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신 핸드폰도 노트북도 아닌 적당히 낡은 아이폰에 국산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왠지 맥북을 쓸 것 같았는데) 마케팅 리드면 CS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될법한데 아직까지 본인이 많은 부분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루 12시간을 기본적으로 CS채널에 쏟고 있었고 그 CS 대응을 하는 중에도 수많은 미팅과 다른 마케팅 업무를 짊어지고 있는 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직 성장하는 스타트업이고 본인이 창업 멤버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소박함 속에 날카로움이 예사롭지 않아 매우 흥미로웠다.
이후 시장 조사를 시작으로 마케팅 업무가 시작되었다. 마케팅 책 10권을 읽었다.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는 나로서 리서치는 좀 자신이 있었는데, 그것도 보기 좋게 깨졌다. 첫 번째 리서치는 정말 논문 쓴 이후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별로 배운 게 없는 것 같을지라도 어떤 특정 업계에서 수년간 몸 담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큰 자산이다. 소위 말하는 업계 용어라는 것은 그곳에 몸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업체가 탑 플레이어 인지, 어떤 정보를 어디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큰 자산이다.
단순한 약어도 잘 몰라서 구글링을 해야 하고 어디에서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기술경영 석사를 들어왔을 때 생각이 났다. 온통 알 수 없었던 용어와 단어들에 어지러웠다. 하지만 석사과정은 더구나 친절하신 교수님과 동기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관련 정보를 흡수하며 성장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리서치 주제를 넘겨받은 하청업자(?)로써 해내야 할 일의 일정 수준이 있었다. 그 수준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열었다. 보고서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한 가지 고민이 계속되었다.
나이 40에 박사학위도 가졌는데, 또다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게 맞을까?
나이를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 나의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마케팅일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찾아온 이 기회를 잡아보기로 했다. 이미 내 나이면 마케팅 리드 자리에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늘 나이가 뭐라고! 외치며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이런 새로운 업무가 무슨 상관일까.
나에게 찾아온 기회,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
재미있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내가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마케터"라고 적힌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장조사와 CS, CRM에 콘텐츠 마케팅, GA, SQL, CRM에 이르기까지 배워야 할 것도 해내야 할 것도 많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싶은 자괴감에 매일 울지만 또 매일 일어난다. 매일 노트북을 열고 거북목이 되도록 화면을 보고 고민한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해보려고 한다. 오은영 선생님께서 "열심히 했다는 경험"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던 것처럼, 무기력하게 박사학위를 받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경험,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마일스톤이 되길 기대한다.
나이를 이렇게 먹었는데 아직도 처음인 게 있다니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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