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단식일기 (26): 한국과 나이로비는 30만 원 차이
나이로비에 온 지 9개월이 되었다.
몇천 원짜리 헐렁한 케냐 느낌 물씬 나는 바지 하나를 구매한 것 이외에 나를 위한 어떤 것도 구매하지 않았다.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이면 충분한 삶이었다. 누군가를 만난 일이 있으면 잘 빨아둔 셔츠 한 장을 입으면 그만이다. 미용실에 갈 일도 화장을 할 일도 없다. 아침에는 물세수를 하고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면 그뿐이었다. 누군가 선물해준 립밤은 9개월째 반도 쓰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소비도 매우 줄어들었다. 갈수록 다리가 길어지는 아이를 위해 바지를 두벌 구매하고 크록스를 한 개 사준 것 이외에 아이를 위한 쇼핑도 현저히 줄었다. A4용지에 색연필이면 온종일 그리고 만들고 논다. 뭔가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이것저것 사주고 싶지만 3M 스카치테이프 하나에 6천 원씩 하는 걸 확인하고 슬며시 내려놓았다. 대신 아이는 온 동네 꽃과 나뭇잎을 가지고 놀게 되었다. 식비, 그것도 진짜 원재료 구입비용 - 당근 양파 쌀 이런 것들-만을 사용한다. 사고 싶어도 밀키트나 가공식품은 살 수 없다. (가공식품은 있지만 입맛에 안 맞는다. TIM) 이대로 나는 소비 요정을 은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돈 쓸 일이 없으니 소비단식일기에 기록할 내용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12월, 남편이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나서 가기 전에 한국행 휴가를 받게 되었다. 그 김에 3월에 면접보고 한 번밖에 가보고 못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회의와 워크숍 일정이 소화하게 되었다. 팀원 9명 중에 1명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너무 궁금했다. 내가 온다고 하니 회사 대표님도 미팅을 요청하셔서 졸지에 미팅 부자가 되었다.
캘린더 가득한 미팅 일정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쇼핑몰 앱을 열었다.
캘린더 가득한 미팅 일정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쇼핑몰 앱을 열었다. 옷 쇼핑을 시작했다. 최소한 착장을 5개는 맞춰야 회사 다니면서 아침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 같았다. 플래너에 그림을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서울 엄마 집에 있는 내 옷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코트는 입을 만 한가' '이런 바지가 있어야 하나''아 신발도 없는데'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 '숏 패딩이 유행이라는데 하나 살까' 참고로 나는 3주 정도 한국에 있을 예정이다. 한두 번 입고 말 패딩인걸 분명 알면서도 아직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는 지우 지를 못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나는 미용실에 가서 할 머리를 미리 정해두었고 얼굴에 바를 톤 업 크림도 귀걸이도 미리 쿠팡으로 주문해서 엄마 집에 배달시켜놓았다.
일만 잘하면 되지 옷이 뭐가 중요할까. 교복처럼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시는 개발자 분들도 알고 있다. 여름에는 검은 티에 청바지, 겨울에는 회색 후드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분이었는데 대단한 실력과 어울러 구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교복처럼 똑같은 셔츠와 바지를 5개씩 맞춰서 입고 다닌다는 사람들의 기사도 보았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더 단순하게 가볍게 살아야지 결심했었다.
하지만 회사에 그래도 단정하게 입고 가야지,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단정하고 적당히 센스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마음에 드는 착장을 입고 거리를 나설 때는 왠지 발걸음에 자신감도 넘친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떠올려본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나는 지금 나이로비에서의 모습 그대로 회사에 출근할 용기가 없다. 중학교 때부터 있던 새치가 더 늘었고 앞머리 없는 머리는 질끈 묶었다. 나이로비의 태양에 얼굴은 그을렸고 기미가 생겼다. 청바지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나갈 때는 늘 검은 스포츠 샌들을 신는다.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고 마크 주커버그는 마크 주커버그일 뿐.
아 안 되겠다. 이 모습 그대로 회사에 갈 수는 없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한걸.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고 마크 주커버그는 마크 주커버그일 뿐. 나는 그저 일개 직장인. 나는 파마도 새로 해야 하고 화장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서울에서 유행에 맞는 적당히 깔끔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싶다. 나도 한 달만 이 회사를 출퇴근하면 아마 편하게 입고 다닐 거야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누구나 처음 회사에 가면 나처럼 고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소비 단식일기를 1년도 넘게 쓰면서 이렇게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걸까. 절망스럽기도 했다. 언제가 더 실력이 늘고 용기가 생긴다면 이렇게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옷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될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무턱대고 사는 것은 아니라 있는 옷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이겠다. 사소한 지점에서 우울과 불안에 쉽게 빠져버리는 나에게 미리 맞춰진 세련된 착장이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 외에도 나는 미용실에 가서 할 머리를 미리 정해두었고 얼굴에 바를 톤업 크림도 귀걸이도 미리 쿠팡으로 주문해서 엄마 집에 배달시켜놓았다. 아이를 위한 미술용품도 잔뜩 구매했다. 책도 100권 사고 싶지만 케냐로 그리고 1월이면 이사 갈 새로운 나라로 들고 갈 자신이 없어 3권만 주문했다. 아마 이마저도 알라딘에 팔고 갈 것이다. 애플 워치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아무래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지웠다. 일단 5개 정도의 착장을 맞춰놓았다. 신발은 더 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목걸이가 하나 사고 싶은데 이건 오래된 위시리스트이다. 그렇게 구매한 것이 전체 30만 원 정도이다. 내 옷 20만 원, 아이의 미술용품과 놀잇감 10만 원.
나이로비와 서울의 차이는 30만 원인 걸까.
나이로비와 서울의 차이는 30만 원인 걸까. 서울행을 앞두자 나는 쇼핑을 시작하고 다시 소비단식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역시 욕망과 소비의 도시는 비행기 티켓만 끊어도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걸까. 나는 서울에 가기 때문에 이렇게 쇼핑을 하는 걸까, 회사에 가기 때문에 그런 걸까. 서울에서의 삶이 계속된다면, 나는 다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갈까? 또다시 카드값 고지서를 보며 절망할까? 시지프스의 돌처럼 힘들게 올린 돌이 굴러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이건 그저 과도기일 뿐일까.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은 서울에 돌아가면 알게 될까.
서울행을 예정했던 나는 수많은 위시리스트가 생겼다. 블루보틀에서 커피도 마시고 싶고 2022년 다이어리도 사고 싶다. 패트릭 와플도 먹어보고 싶고 런던 베이글도 먹어보고 싶다. 평양냉면도 먹어야 하고 태극당도 하야한다. 연어회도 실컷 먹고 싶고 따뜻한 백설기도 먹고 싶다. 뮤지컬도 보고 싶다. 이런 것들 없이도 잘 살았는데 꼭 먹어보고 경험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은 한국행 비행이 취소되며 다 사라졌다.
이러한 고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니 한 가지 이유, 오미크론) 한국행 비행이 취소되며 다 사라졌다. 그리고 엄마 집으로 이미 배송해놓은 물건들만 잔뜩 남았다. 그리고 늘어난 카드값도. 나이로비와 서울의 삶에 대해 비교해볼 기회는 좀 미뤄졌지만, 단지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 만으로 이미 카드값이 늘어나고 소비 요정이 다시 되살아 나는 경험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한국행이 취소되자마자 '아 괜히 샀네'라며 후회하는 내 모습도 무척이나 웃긴다. 이렇게 환경과 상황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에 따라 나의 소비가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다른 이들의 시선을 생각하는 걸 알 수 있다. 누구 보는 사람이 없다고 케냐에서는 편하게 아무 옷이나 입고 지내면서 서울에 가니 당장 옷이 필요해지는 나. 이런 것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상관없이 편하게 입고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거나 늘 단정하게 입고 지낼 것이다. 내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진다면 이런 마음들도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던져준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다행히 수수료 0원으로 취소되었다. (사랑해요 카*르 항공!) 수개월 내에 반드시 한국행을 앞두게 될 텐데 그 때즘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그 사이에 내가 좀 더 성숙해져서 이런 고민들 없이 가볍게 여행을 준비할 수 있을까? 질문은 계속된다.
Photo by Pascal Mei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