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다. 대답하기 싫거나 곤란할 때. 한 번은 누가 어디 사냐고 물어올 때 괜히 신림 쪽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가 싫어서 신도림이라고 얼버무린 적이 있다. 물론 신도림에서 살았던 때가 있긴 하지만. 또 한 번은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돈 없다고 미안하다고 한 적도 있다. 돈은 있었지만 내가 쓸 돈밖에 없던 터라 빌려줄 돈은 당연히 없었다.
거짓말하는 특별한 케이스로 명절이 있다. 명절에는 거짓말이 필수다. 칼과 방패의 싸움이랄까. 이번 추석에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이번 추석은 유독 거짓말을 잘 해야 했는데 바로바로 내가 백수가 됐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애정과 관심이 걱정으로 변질될 수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코로나로 큰집 식구들이 미리 할머니 댁에 들렀다 갔다고 한다.
거짓말 타깃은 할머니 한 명으로 거짓말 수준을 보통으로 설정했다. 할머니를 만날 땐 거짓말이 잘 나오니 무리 없이 수준을 낮게 설정해도 되지만 간혹 별것 아닌 질문이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질문 공격에 잘 방어해야 한다. 그냥 묻는 질문임에도 마치 생선 살 속에 숨겨져 발라지지 않은 가시처럼 입 안과 목구멍을 까슬까슬하게 만든다. 큰 가시가 걸리면 캑캑댈 수도 있다.
Q. 집에 언제 왔니?
가볍지만 날카로운 공격이다. 할머니의 집에 언제 왔냐는 단순히 내 안부를 묻는 거지만 그 안에 담긴 속뜻은 나만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서 대답을 잘 해야 한다. 대답 한 번 잘못하면 걱정(잔소리) 나락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손주 사랑, 손주 걱정은 끝이 없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A. 어제 토요일에 왔어여(백수라 평일에 왔슈).
선의의 거짓말이다. 할머니께 백수라고 고백해 버리면 그땐 끝장이다. 그럼 지금 뭐하고 있냐부터 요새 코로나로 취업두 힘들다던 디, 그냥 기술이나 배워라까지 말이 길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이건 걱정하는 할머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인 거다. 내가 언제 집에 왔는지, 언제 내려왔다고 하는 게 적절한지 요일을 세고, 따져보느라 0.5초 늦게 대답했지만 할머니에겐 상관이 없었다.
Q. 회사는 잘 다니고?
연속 공격이다. 집에 언제 왔니 와 같은 류의 질문이지만 조금 더 디테일한 공격이다. 하지만 피해는 절대 입지 않는다. 내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고 할머니는 잘 다니고 있겠지, 하며 묻는 질문이기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된다.
A. 그럼~ 서울서 잘 댕겨(할무니 나 퇴사해서 백수여).
나는 고? 가 끝나기 무섭게 대답한다. 집에 언제 왔냐는 질문 보다 더 빠르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실력이 되기 때문에 웃으며 할머니와 마주한다. 이런 질문이야 뭐, 친구들에게도 한 번씩 듣는 질문이기에 식은 죽 먹기다.
Q. 손은 좀 괜찮니?
아. 안부 인사가 끝나고 나니 걱정 타임이 시작됐다. 애정과 관심이 걱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아토피가 있는 걸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손에 자리 잡고 있던 피부염을 발견한 후부터 할머니는 내가 오면 꼭 손을 확인하신다. 손 확인이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다른 질문은 스킵 할 때도 있지만 손 확인은 잊어버리지도 않으신다.A. 나아가고 있어유.이건 거짓말로 무마하지 못한다. 확인이 필수로 들어가니 거짓말은 통할 리 없었다. 대충 애매하게 말하고 손을 감췄다. 안부 공격은 선방했지만 갑작스러운 손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할머니가 더 걱정하시기 전에 얼른 낫든지 해야겠다. 후, 이놈의 알레르기.
Q. 결혼해야지~ 남자친구는 있고?
70%에 달하는 막강한 피해를 입었다. 결혼?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가 결혼 얘기를 듣다니. 생전 처음 받는 결혼 공격이다. 정신을 잘 차리고 대답해야 한다. 지금 잘 대처해 두지 않으면 매해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다. 너무 뻔해 보이지 않게, 너무 정직하지 않게 대답하는 게 관건이다.
A. 결혼은 무슨~ 나 시집 안 가. 돈두 없어(남자친구는 있는데 결혼은 한참 있다가~).
철없음으로 방어에 성공했다. 철없는 손녀 콘셉트로 무슨 결혼이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 아빠랑 평생 살 거야까지 더했으면 완벽했는데 이 대사까지 하기엔 내가 너무 당황했다. 공격에 빠르게 대처할 생각만 하고 간단명료하게 대답을 했다. 결혼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매해 들을 걸 감안하고 멘트를 정해놔야겠다. 철저하게 막아야겠다. 빈틈은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로 큰집 식구들이 미리 할머니 댁에 들렀다 간 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안 그랬으면 큰 아빠, 큰 엄마, 고모, 사촌 언니 등 여러 사람에게 결혼 공격을 당했을 거다. 정신을 부여잡고 있기 힘들었을 수도.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은지 현명한 사람의 지혜를 참고해야겠다.
내년 명절에는 계획적으로 전략을 잘 짜야겠다. 미리 사전 질문 리스트를 뽑을까? 아니면 진짜 덕담, 질문할 때마다 용돈을 받는다고 할까? 거짓말을 안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사랑하니까. 앞으로도 누군가 대답하기 싫거나 곤란한 질문을 해 올 때면 거짓말로 얼렁뚱땅 무마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