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로 시작되는 전화는 받지 말아야 한다

by seoro

두둥-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보며 여유로운 점심을 만끽하고 있었던 그때였다. 노트북 오른쪽 상단에 전화 알람이 뜨며 아이폰 벨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깜짝 놀랐다. 소리가 너무 커 재빨리 보던 영화를 정지시키고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02-XXXX-XXXX


02로 시작되는 전화였다. 누구지? 광고 전화 같은데. 서울에서 연락 올 곳이 어디 있더라? 받을까, 말까. 평소 같으면 안 받고 마는데 오늘따라 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2초 정도의 고민 끝에 나는 받기로 결정했다.


휴대폰이 생긴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02로 시작되는 번호의 전화는 잘 받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휴대폰에 02가 뜨면 서울 특유의 무서움이 느껴졌다.(지방 사람이라 그렇다) 내가 서울에서 전화 올 곳이 어딨어?라며 전화가 끊어지길 기다리거나 거절 버튼을 눌렀다. 서울 사는 큰집 식구가 집 전화로 걸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받아보기도 했으나 백이면 백 광고성 전화였다. 지금은 이런 경험을 통해 02만 보면 바로 무시하는 ‘습관성 02 거부 반응’이 생겼다.


아, 혹시 저거 지원한 회사에서 연락 온 거 아냐? 뭔가 느낌이 그래. 받아보자. 큼큼- 빠르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긴장한 마음도 살짝 가라앉힌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현대 HCN입니다. ㅇㅇㅇ고객님 맞으시죠?


네. 에이, 좋다 말았다. 내가 보고 있는 유선 방송에서 온 전화였다.


저희가 고객님만을 위한 특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오늘부터 10월 26일까지 한 달간 550원으로 영화를 마음껏 보실 수 있게 해드리고 있어요. 원, 원, 원래는 달에 11,000원 하는 서비스인데 파격 할인으로 550원에 보실 수 있으세요. 58, 59번 채널에서 영화 10편이든, 100편이든 마, 마, 마음껏 보시고 26일까지 550원만 내시면 되세요. 영화 한 편 값도 안 나오는 가격이에요. 영화 좋아하시면 가입하셔서 한 번 보시는 거 좋을 거 같은데. 가입 괜찮으시죠?


아뇨… 제가 TV를 잘 안 봐서요.


허? 가입 괜찮으실까요? 도 아니고 가입 괜찮으시죠? 어이가 없네. 게다가 말도 더듬고. 말할 틈도 안 준다. 짜증 난다. 가뜩이나 돈 아끼려고 저렴한 유선 방송 보는 건데. 흥, 내가 가입할 줄 알고?


고객님. 1,000원도 안 하는 가격인데 이번에 한 번 가입하셔서 보고 싶은 영화 보, 보시는 거 어떠세요? 한 달 동안 보셔도 550원이세요, 고객님. 일단 하루 보시고 판단해 보세요. 게, 게, 게다가 한 달에 550원 일괄 부과되시는 게 아니고 5일이면 180원, 10일이면 380원 보시는 날짜에 따라 부과되기 때문에 보시고 결정하셔도 되세요. 아니면 보시고 당일 해지하셔도 되고요.


태세를 전환하고 나를 붙잡는다. 남자분이셨는데 당황한 기력이 역력하다. 머리 굴리는 소리,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 런. 데. 생각해 보면 달에 550원이면 꽤 괜찮은 혜택 아닌가?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 서비스는 만 원이 넘는데. 너그럽게 한번 가입해 줘 볼까? 뭐, 저 사람 실적도 올려주는 셈도 되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해지할 수 있으니까.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말도 더듬는 이 남자 상담원에게. 신입인 듯 긴장한 말투로 원고를 그대로 낭독하고 있는 이 남자 상담원에게.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영화 좋아하기도 하고 까짓것 가입해 주자! 그래, 500원이잖아.


앗. 네네!! 그럼 동의를 위해 확인 몇 가지만 하겠습니다~!


실적 올려서 좋으신가 보다. 내가 넘어가 줘서. 아까 말 더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목소리가 신나셨다. 목소리에서 긴장은 싹 없어지고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제가요, 상담원 님 말발에 넘어간 게 아니고요. 영화를 보고 싶어서 너그러이 가입해 드리는 겁니다? 아셨죠?


가입을 마친 나는 전화를 끊고 영화 채널 편성표를 검색했다. 이럴 수가. 당장 마음에 드는 영화 편성이 없다. 3일 후에나 그나마 괜찮은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서인국 주연의 파이프라인이다. 호기롭게 서비스를 가입하긴 했으나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다. 하루 이틀 지나고 편성표를 다시 검색해 봐야겠다. 보고 싶은 영화가 편성될지도 모르니까.


돈 아낀다고 저렴한 유선 방송 보는 난데... 알뜰 절약하는 내 모습은 어디로 갔지? 다음 달 추가로 부과될 550원은 다른 곳에서 아껴야겠다.


역시 02로 온 전화는 받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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