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을 좋아할 나이는 지났지만

by seoro

갑자기 침대 끝이 푹-하고 꺼졌다. 누군가 내 침대에 누웠다. 그런 느낌이었다. 벽을 보고 새우잠을 자던 나는 등 뒤로 느껴진 오싹함에 눈이 탁 떠졌다. 이 느낌은 뭐지? 누구지?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누군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만 남아있었다. 단번에 이불을 젖혀야 한다. 재빠르게 이불을 젖히고 누군지 알아내야 한다. 하나. 둘. 셋.


아무도 없었다. 누가 누울 만한 여유 공간도 없었다. 그럼 옆에 누가 누운 듯한 그 느낌은 뭐지? 나는 곧바로 그 답을 찾았다. 악몽이다. 악몽임을 깨달은 나는 소름이 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숨을 돌린 후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4인치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불빛이 어두컴컴한 방안을 온통 푸르뎅뎅하게 만들었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2017년 자취 시절, 나의 첫 악몽은 이랬다. 악몽을 꾸고 나서는 한동안 그 생생함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악몽에 대비해 몇 주씩이나 TV를 틀어놓고 자야 했다. 소리는 꺼두고 화면만 켜지도록 말이다. 이후에는 전등을 사서 조금은 편하게 잤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바나나 인형,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나나 모양 보디 필로우를 선물 받았다. 회사 동생에게 받은 생일선물이었는데 이게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바나나 인형은 1m 길이로 아주 부드럽고 푹신했다. 몸에 샥- 감기는 게 껴안고 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후 나는 한 여름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바나나 인형과 함께했다.


지금까지도 바나나 인형과 함께 하고 있다. 바나나 인형은 다리 쿠션이 되어주고, 노트북 받침대도 되어주고, 샌드백도 되어줬다. 그중 ‘기사’ 역할이 컸는데, 잠을 자는 동안 나를 지켜주는 기사라고나 할까. 무방비한 내 등을 보호해 주는 역할로 바나나 인형과 등을 맞대고 자면 그렇게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덕분인지 바나나 인형과 함께 잘 때면 악몽을 꾸지 않았다.


인형이 확실히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악몽을 꾸지 않는 확실한 이유는 따로 있다. 마음 편하게 자는 것, 걱정 거리를 안고 잠들지 않는 것. 처음 악몽을 꿨을 땐 공모전 준비로 심신이 힘들었다. 친구, 선배와 팀을 꾸려 진행하는 거라 잘하고 싶은 욕심,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이 욕심과 불안이 날 괴롭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몽은 이걸 먹고 생겨났고. 공모전이 마치고 난 후에는 날아갈 듯한 가벼움을 느낌과 동시에 걱정거리가 싹 없어졌다. 물론 악몽도 함께.


잠을 잘 땐 모든 근심,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잠자는 기쁨과 행복을 생각하며 자야 한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드디어 잠잘 시간이 왔다. 기분이 좋다. 나는 오늘 밤도 바나나 인형과 함께한다. 인형을 좋아할 나이는 지났지만 없으면 허전해서. 걱정거리는 없지만 내 등을 보호해 줄 무언가는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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