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살갗이 타들어 갈 듯한 더위가 느껴졌다. 거래처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대던 김 과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거렸다.
"강민성 씨, 지금 자원봉사 합니까? 이런저런 사정 다 들어주면서 어떻게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점주들 이야기 들어주지 말고 그냥 할 일만 깔끔하게 하고 다니세요."
하루에도 열 번씩 김 과장의 멱살을 잡고 악다구니를 하며 한 판 붙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퇴직금 모두 쏟아부어 살아보겠다고 편의점을 개업한 사람들이었다. 장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개진상 손님들을 상대하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 본사 직원을 붙잡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잘라내고 매뉴얼대로 움직이며 매장만 살펴보고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무주공 편의점 앞에 다다랐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놀이터 앞에서 서서 매장을 바라봤다. 사장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편의점인데도 이상하게 매출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유 점주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또 한숨과 함께 어떻게 하면 매출이 오를 수 있을지 이곳에 하면 잘 될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라디오를 틀어놓은 듯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망부석이 된 듯 그 자리에 붙박이가 되어 바라봤다. 30여 분이 넘게 매장을 바라봤지만 단 한 명의 손님도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오늘 매장 순찰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민성이냐? 나야. 오늘 저녁 시간 어떠냐?"
"어. 별일 없어. 만날까?"
"그래, 그렇지 않아도 퇴근하려던 참이었어. 그래. 거기서 보자."
벤치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모래 속에서 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모래를 조심스레 파헤쳐 들어보니다이아몬드로 만든 것 같이 빛나고 있었고 이어팟처럼보였다. 모래를 털고 귀에 꽂아 보니 딱 맞았다. 주위를한 번 살펴본 다음 이어팟을 주머니에 스윽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곱창집 구석에 승훈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인사를 했다. 결혼 한 지 얼마 안 된 승훈의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그늘이 가득했다.
"잘 지냈어? 깨 잘 볶고 있지?"
승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귀에 꽂고 있는 이어팟에서 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 볶고 있기는... 너무 힘들어.'
놀란 마음에 이어팟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봤다. 톡톡 두드려 봤다.
'이게 뭐지?'
"우선 뭐 먹을 것 좀 시키자."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새 신랑 얼굴이 좀 까칠하다."
"그냥 그렇지 뭐."
이어팟을 다시 귀에 꽂아봤다. 그리고 승훈의 눈을 바라봤다.
'민성아, 돈 좀 빌려주라. 와이프가 결혼 전에 빚을 진 게 있는 것 같아.'
이어팟에서 들려오는 민성의 목소리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민성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고 있었다. 승훈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경제권을 모두 와이프가 갖고 있고 용돈을 받아 쓰고 있는데 승훈에게 빌려 줄 돈은 없었다. 카드 대출이라도 받아 돈을 빌려준다고 해도 민성의 용돈으로는 이자를 갚을만한 능력이 되지 않았다.
두 시간 넘게 같이 있는 동안 승훈은 끝내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멀어지는 승훈의 뒷모습을바라봤다. 축 처진 어깨로 비틀비틀 다리가 무거운 듯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지금이라도 다시 승훈을 불러서 계좌번호를 물으며 바로 송금하겠다고 하고 싶었다. 민성은 멀어져 가는 승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귀에서 이어팟을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이어팟의 모습이었다. 술이 많이 취했던 건 아닐까 싶어 뺨을 세차게 때렸다. 뺨이 얼얼해졌다. 다시 이어팟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어록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부스스한 얼굴로 맞았다.
"저녁은?"
"먹었어."
"빨리 씻고 자."
아내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민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매일이 똑같았다. 아침에 눈곱이 잔뜩 낀 얼굴로 잠에서 덜 깬 채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네고, 저녁이 되면 저녁은 먹었는지 확인을 하고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잠을 재촉하는 인사를 한다. 아내는 민성과 사는 게 괜찮은 건지 궁금해졌다. 승훈은 주머니에서 이어팟을 꺼내 귀에 꽂았다. 텔레비전을 보는아내의 눈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이 남자, 안 하던 짓을 하지? 빨리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
역시 민성의 예상대로 아내는 민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았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별 시답잖은 영상을 보며 깔깔댔다. 아내가 침대로 들어왔다.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했다. 아내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아내의 위로 올라탔다. 눈을 감고 있는 아내의 생각이 궁금해져 손을 뻗어 이어팟을 귀에 꽂았다. 아내에게 눈을 떠 보라고 했다. 아내가 승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곧이어 이어팟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끝내자. 제발... 우진 씨라고 생각하자. 낮에 우진 씨랑 좋았는데...'
심장이 뛰었다. 지금 아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우진이 누구냐고 소리 내어 물어볼 뻔했다. 민성은 슬며시 아내에게서 내려왔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는 이어팟을 손에 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멀어져 가는 승훈의 뒷모습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겹쳐졌다.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민성은 하얀 조약돌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