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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커피

연역적 커피와 귀납적 커피

by 왈풍류

연역적 커피와 귀납적 커피


“귀납적 커피는 이름이 맛을 설명하고,

연역적 커피는 맛이 이름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무언가를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이 어떤 것일지 마음속에서 판단하고,

그에 맞춰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커피는 마시기도 전에

‘맛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먼저 내려집니다.

유명한 브랜드, 챔피언의 이름,

고급스러운 포장, SNS의 찬사.

그 모든 외부 정보는 뇌에

기대 프라이밍(priming)을 불러오고,

우리는 그 기대에 맞는 감각만을

선택적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결국 우리는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라,

‘기대’를 마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커피를 저는 ‘귀납적 커피’라 이름 짓습니다.

마시기 전에 의미가 덧씌워지는 커피.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커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도 낯설고,

소개도 없는 커피가 있습니다.

조용한 골목의 작은 카페에서

말없이 건네받은 한 잔.

그 앞에서 뇌는 판단을 멈춥니다.

감각을 열고,

입 안에 스며드는 향과 온기,

리듬과 여운에 귀를 기울입니다.

감각이 먼저 말을 걸고,

뇌는 그제야 조용히 의미를 짓기 시작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 과정을 의미화(meaning-making)라고 부릅니다.


이런 커피를 저는 ‘연역적 커피’라 부릅니다.

맛이 먼저고, 이름은 나중에 따라오는 커피.


12초간의 음미 — 기억되는 커피가 되는 시간


진짜 연역적 커피는,

마신 뒤에도 기억 속에 머무는 커피입니다.

그 기억을 위한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단지 12초,

한 모금 마신 후의 조용한 음미.


뇌과학은 말합니다.

감각 자극에 10초 이상 집중하면,

그 감각은 장기 기억으로 옮겨간다고.

12초는 감각이 기억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왈풍류커피점은 조용히 권합니다.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놓고 잠시 머무는 시간.

그 12초가,

단순한 커피를 기억될 커피로 만들어 줍니다.



마이센과 아라비아 커피잔

― 커피는 잔에서도 말합니다


귀납적 커피는 마이센(Meissen)을 닮았습니다.

흰 자기 위에 코발트 블루와 금박이 정교하게 수놓인 잔.

보는 순간, 우리는 먼저 생각합니다.

“이 커피는 훌륭하겠구나.”

잔이 먼저 말하고, 이름이 맛을 규정합니다.


저는 이 잔을, 귀납적 커피의 그릇이라 부릅니다.


연역적 커피는 아라비아(Arabia)를 닮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손에 감기는 무게와 조용한 질감.

작지만 깊고,

쓰는 사람의 감각이 잔을 완성합니다.

감각이 먼저 말하고,

맛이 그 이름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잔을, 연역적 커피의 그릇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왈풍류커피점은...


당신에게

마이센의 커피를 보여주기보다는,

아라비아의 커피를 건네고 싶습니다.

그 잔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입 안의 여운이 여전히 머무는 바로 그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연역적 커피는 본래,

아무런 정보 없이 경험되어야 진짜입니다.

그래서 이 글조차

읽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뇌에 정보가 들어가는 순간,

그 커피는 더 이상 연역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글은 지금 이 순간,

펑— 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도 함께 리셋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커피 한 잔의 여운만을 남기세요.

당신의 감각이 먼저 말하게 하세요.

그게 진짜, 연역적 커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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