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찬바람이 불면 ‘가을이 왔구나’ 싶다가도,
한낮의 햇살 속에서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음을 느낀다.
낮이면 여름, 밤이면 가을.
사람들은 이 애매한 경계를 환절기라 부르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다섯 번째 계절이라 불러왔다.
이 계절에는 어김없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알러지 비염.
콧물과 재채기, 무거운 머리.
몸은 힘겹고 마음은 괜스레 쓸쓸해지지만,
묘하게도 이 시기에 듣는 음악은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온다.
같은 곡이라도 다섯 번째 계절의 공기 속에서는
감흥이 배가된다.
쓸쓸함이 스피커 너머로 울림을 덧입히고,
그 울림은 다시 내 안의 공허를 채운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나는 늘 주섬주섬
익숙한 음악들을 찾아 듣는다.
매년 반복되는, 나만의 작은 의식처럼.
1.알랑 드롱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 주제곡
2.〈대부〉 속의 Love Theme (니노 로타 작곡, 특히 엔디 윌리엄스가 부른 버전은 유난히 애절하다)
3.“나 아직 살아 있어.” 그 대사가 떠오르는, 영화 〈빠삐용〉의 주제곡
구월 초·중반,
아침저녁은 선선한데 낮에는 여전히 태양이 뜨겁게 내리쬔다.
저 푸른 하늘엔 영화 제목처럼 태양이 가득하고.
그럴 땐 나는 늘 〈태양은 가득히〉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푸른 지중해의 햇살 아래,
알랑 드롱이 썬베드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멀리서 한 척의 요트가 천천히 해변으로 다가오고,
그 순간 비장한 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곧,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운명이 드러날 순간이 다가온다.
눈부신 태양은 여전히 가득하지만,
그 빛은 더 이상 그를 감춰주지 못한다.
두 번째 곡, 〈대부〉의 Love Theme는
마피아 가문의 비극적인 서사와는 달리
선율만큼은 애절하면서도 따뜻하게 흐른다.
나는 사실 마피아 영화 자체는 취향이 아니지만,
니노 로타가 남긴 이 곡만큼은 늘 마음을 흔든다.
환절기의 쓸쓸함을 품은 듯한 그 선율은
늘 〈태양은 가득히〉 다음 순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은 〈빠삐용〉.
영화 말미,
바다 한가운데 코코넛 떼목 위에서 세상을 향해 던지는 몸짓.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외침과 함께 흘러나오는 주제곡은
다섯 번째 계절의 끝에서,
본격적인 가을의 서막을 알린다.
이 세 곡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비염으로 힘겨운 다섯 번째 계절을
쓸쓸함이 아닌 센치한 낭만으로 바꿔주는,
내 오랜 반려 음악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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