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 극장 같은 카페
smultronställe – 스물트론스텔레
'스물트론스텔레'는 스웨덴어로 ‘딸기밭’을 뜻하는 단어지만,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찾는 장소를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호수와 함께한 시간
대학 시절, 학교 정문 맞은편에는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호수가 있었다.
해 질 무렵이면 붉게 물든 노을이 호수 표면에 길게 드리워지고, 마치 황금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로 시간을 흘려보내다가도, 그 순간만큼은 놓칠 수 없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아 호숫가로 향하곤 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도 작은 호수가 있다.
차로 삼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한 달에 서너 번은 찾는 나만의 안식처다.
규모는 작지만, 호수를 둘러싼 풍경만큼은 여느 유명 관광지 못지않게 아름답다.
대형 카페, 베이커리 카페,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호숫가를 따라 줄지어 서 있다.
해 질 녘이면 잔잔한 수면 위로 노을빛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내가 찾는 곳은 그런 화려한 카페들이 아니다.
삼류 극장 같은 카페, 시네마 파라디소
호숫가 카페들을 스쳐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를 몰고 십 분 정도 달리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도로 오른편 멀찌감치 물러난 곳에 카페가 보인다.
카페 건물 상단에는 상호 대신 빛바랜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낡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는 곳이다.
밖에서 바라본 카페 건물은 오래된 동네 극장을 떠올리게 한다.
문 앞에는 매표소처럼 생긴 작은 창구가 있지만, 입장권을 팔지는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고 어둑한 공간, 은은한 조명에 감싸여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낡은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오래된 영화 포스터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곳은 진짜 극장처럼 로비를 지나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구조는 아니다.
카페 한편에 마련된 작은 상영 공간에는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두 줄로 놓인 의자들이 전부다.
의자 뒤편의 영사기가 차르르 돌아가며 영상을 비추면, 맞은편 하얀 벽에 영화가 시작된다.
상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오래된 명작 영화부터 독립 영화, 예술 영화까지 다양한 영화들이 그때그때 상영되고 있다.
카페의 커피 바는 극장의 작은 매점처럼 꾸며져 있다.
팝콘을 비롯한 여러 간식과 음료를 팔지만, 이곳에서 맛봐야 할 인기 메뉴는 솜씨 좋은 바리스타가 정성껏 내려주는 드립커피다.
매점 벽에는 영화 스틸컷과 포스터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고, 그 사이로 부드러운 커피 향이 가득 퍼진다.
어릴 적, 친구들과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으며 배우와 영화에 대해 들떴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설렘을 커피 향이 대신한다.
알프레도와 토토: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을 담은 커피
카페는 '시네마 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메뉴판에는
'알프레도'와 '토토'라는 두 잔의 드립커피가 있다.
-알프레도
진한 강배전 드립커피 위에 레몬 휘핑크림을 올렸다.
달고, 쓰고, 신. 인생의 모든 맛이 담긴 커피.
-토토
엘레강스 오리진의 화사한 꽃 향이 가득한 에티오피아 드립커피.
첫 모금에서 퍼지는 꽃 향과 과일의 달콤함은 마치 봄날의 정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린 시절의 맑고 순수한 기억이 그대로 담긴 커피.
두 커피를 함께 주문할 수 있는 '알프레도와 토토' 세트도 있다.
세트를 주문하면 말차 스콘이 서비스로 제공된다.
나는 대부분 혼자 이곳을 찾지만, 언제나 '알프레도와 토토' 세트를 주문한다.
알프레도의 묵직한 깊이와, 토토의 화사한 향도 좋지만
무엇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말차 향의 쌉싸름한 스콘이 커피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물론 오후 늦게 마시는 커피의 카페인은 나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가끔 한 모금 정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말차 스콘만큼은 한 조각도 남기는 법이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해 질 무렵, 카페의 작은 상영관에는 이미 자리가 다 찼다.
매점 앞 테이블도 만석이다.
다행히도, 아직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모른다.
나는 매점 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한다.
바리스타는 뒤돌아 ‘알프레도와 토토’를 만들고 있다.
커피 머신이 놓인 뒤편, 커다란 통창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들어온다.
마침, 알프레도와 토토가 내 앞에 놓였다.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올린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향 너머, 저 멀리 작은 호수가 보인다.
붉은 노을은 아직 호수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