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茶人은 설렌다
남도 여행
봄이면, 茶人은 설렌다.
따뜻한 햇살, 화사한 꽃 때문이 아니다. 차나무에서 갓 딴 햇차가 남도의 습기 어린 공기 속에서 은은한 향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봄을 마중하러 남도로 향한다.
오랫동안 남도 여행은 봄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해마다 봄이 오기 전이면 남도 여행을 꿈꾸며 설렘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도는 봄보다 여름이다. 그것도 7월 초에서 중순, 장마가 한창일 때. 남도 여행의 진짜 얼굴은 그때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가방을 꺼내려 차 트렁크를 연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남도의 짙은 차향이 퍼진다. 떠나온 줄 알았던 남도는 여행가방 틈새에 조용히 스며든 채 따라왔다.
비에 젖은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면앙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큰 우산을 써도 바지는 무릎까지 젖고, 선암사 승선교 아래 계곡물 소리는 장대비와 뒤섞여 더욱 거세진다.
신발 속까지 스며든 빗물은 몸을 눅눅하게 만든다. 젊은 시절, 비 좀 맞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축축한 감각의 묘미를 알 리 없다.
차에 오르자마자 접은 우산을 던지고, 에어컨을 켠다. 하지만 젖은 옷은 냉기를 머금고 있어, 오히려 으스스한 한기만 더한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자동차 와이퍼를 아무리 빠르게 돌려도 남도의 887번 지방 도로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도로는 빗물에 잠기고, 카오디오에선 쳇 베이커의 트럼펫이 흘러나온다. 창밖은 온통 희뿌연데, 천둥과 번개가 번쩍인다. 음악과 자연이 맞부딪쳐 만들어낸 한 편의 오페라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장마철이 아니고선 도대체 어느 누가 나만을 위해 이토록 무모하고 아찔한 연출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비상등을 켜고 잔뜩 긴장한 채 핸들을 움켜쥔다. 폭우 속을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마침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과 구름과 산. 농도와 명암만 다를 뿐, 모두 먹빛이다.
소치 허련이 바라본 것이 바로 저것이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도 그것일 터.
아뿔싸. 나는 지금 차를 탄 채로 그의 화폭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광풍과 제월을 넘어 운림산방과 일지암을 지나 마침내 초당의 툇마루에 다다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하얀 백자에 담긴 맑은 녹차 한 잔.
그림 속으로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나갈 길은 알지 못한 채.
빈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