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결심의 순간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학교가 그렇고,
연애가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그리고 직장이 그러하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해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변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장은 불분명했던 판단들이 오히려 나중에 좋은 결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퇴사를 결심하던 순간이 나에게 그러했던 것 같다.
새벽 3시 강남.
사무실에서 퇴근 준비를 하면서 택시 예약을 한다. 평일, 주말 없이 새벽에 퇴근하는 일이 근 2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힘겹게 택시 뒷자리 문을 열고, 도착지를 토해내며 자리에 털썩 앉는다.
"이제 퇴근하세요? 좋은 직장 다니나 보네."
좀 쉬고 싶은데 귀찮게 생겼다. 대꾸하기 싫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상냥한 말투가 언제 위협적으로 바뀔지 모를 일이다. 여전히 세상은 온갖 흉흉한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좋은 직장 아니에요."
"지금 퇴근하는 거 보면 세무소 다니는 것 같은데. 연말정산 때문에 바쁠 때잖아."
기사 아저씨는 끝까지 알아 낼 심산인지 질문을 끈질기게 이어나가신다.
"세무소 안 다니는데."
"그럼 돈을 많이 주나 보다"
스무고개 같은 이 피곤한 질문 공세를 끝내고픈 마음에 앞선 대답보다 단호하게 그리고 힘을 주어 대답했다.
"아.니.요."
"아 그럼 뭐 하러 다녀. 때려치워요. 허허. 아가씨 많이 힘들겠네."
"......"
약간의 어색한 공기와 세 번의 기침소리가 있었고, 택시 안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아가씨 많이 힘들겠네.’
진심이었든 아니든 낯선 사람의 위로는 믿기지 않겠지만 생각보다 컸다.
뿌옇게 희미해져 사라질 날만 기다리는 감정하나를,
심장 깊숙이 박힌 그것을 툭하고 건드리는 것 같았다.
'그래 나 힘든 거였지.'
하지만 이토록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기사 아저씨의 위로가 퇴사 결심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택시에서 내린 후, 집에 돌아와 내일 입을 옷을 꺼내려 옷장을 열었을 때였다.
옷장에는 온통 무채색의 셔츠와 정장 바지, 딱딱한 자켓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회사를 위해 입는 옷일 뿐 내가 좋아하는 옷은 아니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심오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문득 열어본 옷장에 그 흔한 레이스나 리본 달린 옷 하나 없는 것을 안 순간 문득 나는 왜 사는가 싶었다.
매일 업무를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보고 마음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 부탁을 들어주고 가짜 웃음을 날리면서도, 정작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희미한 미소조차 지어 보일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만 두자.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진짜.’
퇴사를 결심한 순간이다.
퇴사의 의지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날 가방 속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친분이 깊지 않은 임원과의 '수고 많았다. 잘 지내라'는 의미 없는 말들을 나누며 헤어진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이상하리 만치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또렷이 기억나는 건,
뒤돌아 나오면서 음악을 들으려 가방 속에서 이어폰을 꺼냈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침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 좋아 미칠 것 같았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