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지 못한 이유
"지금 봉화산, 봉화산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열차 안에 들어선 후 재빨리 주변을 살핀다.
지하철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때문에 불안했던 경험을 한 이후 나는 어딜 가든 주변을 먼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평일 낮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다행히 안전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지하철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 수는 정해져 있다. 한 라인에 최대 6~7명이 앉을 수 있지만 체격의 차이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 아무래도 체격이 큰 사람들이 많을수록 서로의 영역이 줄어들어 불편한 자세로 도착지까지 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현재 나를 포함해 자리에 앉은 사람은 모두 6명. 빈자리 때문에 좌석은 아직까지 불편함 없이 충분히 여유로웠다. 잠시 후 열차가 정차했고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제발...'
몸집만 한 가방을 좌석 위 선반에 올린 후 주저 없이 빈자리에 앉는다.
그곳은 내 옆.자.리.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의 나는 불편한 자세로 도착지까지 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를 포기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그 순간 무슨 심보인지 이제 더 이상 내 것을 뺏기지 않겠다는 황당한 오기가 발동했다. 옆 사람과의 자리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몸을 최대한 크게 만들고 힘을 주며 버텼다. 내가 이렇게 기를 쓰며 격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아마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심 1센치라도 넘어오면 당장이라도 발끈할 기세와, 입사 면접에서도 볼 수 없었던 비장함마저 장착했다. 그야말로 나는 내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던 걸까.
옆자리 건장한 청년은 내 쪽을 살짝 힐끗거리더니 자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몸은 최대한 앞으로 숙인다. 자리를 조금이라도 내어주려는 배려의 몸짓인 것이다.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무슨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는가.'
직장을 다니면서 나는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도 스스로 돈을 벌어 먹고 살고 있으며, 심지어 용돈도 드리는 제법 효도 비슷한 것도 하고 있다. 직장 안에서는 또 어떤가. 상사나 동료에게 예의 바르며, 아나운서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고급스러운 말투와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에 주저하지 않으며, 배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른이다. 적어도 회사에서만큼은 내 것을 사수하기 위해 고집부리는 철없는 모습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난, 직장에서만 어른이었던 걸까.’
어른이 된 것 같다가도 가끔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철없는 생각과 행동은 나를 부끄럽게 하고, 또 어른에서 멀어지게 한다.
하늘은 무심하게도 매너 있는 청년보다 내가 먼저 열차에서 내리는 행운은 주지 않았다.
결국 난 도착지까지 무사히(?) 자리를 지켰고, 도착 내내 뜨거워진 얼굴을 들킬까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에서의 육체노동, 감정노동의 대가는 꽤 컸다.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 긴장하며 몸을 써서인지 하루 종일 진이 빠져 다른 일을 하는 게 어려웠다. 또 철없는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터진 이상한 고집 때문에 하루를 망친 셈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가 많은 사람? 남을 배려하고 본인 행동에 책임 질 줄 아는 사람?
명확히 결론 내릴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른이 아닌 것은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