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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Jan 05. 2019

로스쿨일기: 새해 맞이 첫 글

로3의 서막

글을 주기적으로 쓰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않았는데, 하여 2019년은 일주일에 한편 정도는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주제의 일관성이 없을 것으로 보여 읽는 재미가 있을지 자신하기 힘들지만 1년의 소묘 정도의 의미는 있지 않을까. 


1.  2019년 첫 덜렁거림 


  3학년을 맞이하여 바빠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 중 하나로 영어성적 갱신이 있었다. 연말 노느라 바쁜 중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챙긴 것이 TEPS 등록이었다. 1월 4일 토요일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접수를 하고는 일부러 다음날 가기 편하려고 금요일 저녁에 본가에 갔다. 새해부터 정신줄 놓치 않고 계획한 바를 실천해 나가는 내가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끌려가듯이 그때 그때 필요한 일을 겨우 해내던 지금까지의 관성을 청산하는 빛나는 새해의 첫걸음. 


 시험장에도 여유 있게 도착하여 가방을 내리고 외투를 벗고 2자루 준비해간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을 책상에 살포시 놓고 4부나 출력해서 곳곳에 꽂아둔 수험표도 하나 찾아서 세팅하고 이제 신분증을 내 애용하는 카드지갑에서 꺼내려는데... 신분증이 없다. 항상 내 카드 지갑에 꽂혀있던 내 신분증이 없다. 주민등록증은 지갑에 넣어두고 운전면허증을 카드 지갑에 넣어서 가지고 다녔는데... 운전면허증이 안보인다. 아... 아마도 지난 학기 검찰실무 기말에 신분증 꺼내놓고 치울 때 제대로 넣어놓지 않은 것 같다. 낭패다. 시험 종료 30분 전까지 신분증을 보완하면 일단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집에 구차한 부탁을 하지 않고서야 보완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짐 싸서 나오는 것 뿐이 방법이 없다. 그렇게 나는 허탈하게 시험장을 나왔다. 


 오늘만 날도 아니고, TEPS는 별달리 준비가 필요한 시험도 아니고, 다시 접수해서 보면 그만일 일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조차 제대로 안 챙긴 내게는 크게 실망이다. 그것도 새해 첫 공식 일정인데. 유형 바뀌었다는 TEPS 세부내용을 확인안 한 것은 나름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출발전에 신분증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도 확인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안일함. 새해를 안일함으로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남은 한 해, 최선을 다하지 않아 펑크나는 것들이 없게 챙기겠다고 스스로와 다짐해본다. 허세없이 겸소한고 진지하게 수험에 임하겠다. 




2. 존재론적 위협, 그 달콤한 매혹 


 이건 아주 현학적인 이야기이다. 간만에 작정하고 현학의 끝을 달려보겠다. 


 방학하고 놀아도 좋을 시간이 아님에도 놀면서 본 미드 중 하나가 '트루 디텍티브' 시즌1 이었다. 이 작품은 더 이상 현학적일 수 없는 대사들을 나름 설득력 있게 늘어놓은 수작이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라는 진부한 주제를 마치 텍스트를 영상으로 풀어놓은 것처럼 드라이하게 풀어가면서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는데, 다만 지독한 허무에서 결국은 희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버린 결론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사보다는 철학수필을 읽는 것 같은 대사들이 사람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듣는 맛으로 보는 영화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문과생이 우주에 대한 이론을 접하게 되면 수많은 형이상적인 헛소리들을 상상해내기 마련인데 그 중에 그래도 나름 멋을 부린 해석을 8화 짜리 미드에 담았다랄까. 아무튼, 이 드라마에서 재미있게 생각해볼 것은 존재의 무의미함과 그럼에도 존재함이 가지는 의미(그렇다 말장난이다)에 대한 여러 대화들이다. 요약하자면, 시간에 대한 선형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처음과 끝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달리 모든 것은 '존재'할 뿐이며(혹은 존재 속에 있으며) 이를 겪는 우리의 단계가 어디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들과,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일어날 일들은 모두 인과에 의하여 고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 안을 각 개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라는 주인공 러스트 콜(매튜 맥코너휴 분)의 독백이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것이다.


  극중에서 콜은 이렇게 (시간을 포함한) 총체로서의 존재를 선형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임에 답답함을 느끼며 이 의미 없음의 한계 속에 있음에 버거워하며, 존재 그 자체를 원치않게 부여된 어떤 천벌처럼 느끼며 하루하루를 그저 '존재'해 나가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드라마의 끝에서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존재를 관념하기 보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잃어버린, 아직 가지고 있는, 앞으로 잃어버리게 될 모든 것들을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존재와 그 연장으로서의 각 개체간의 분별이 없음을 인지하며(써드 임팩트??) 삶에서 감사하게 느낄 수 있었던 모든 순간은 흘러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함을 역설하며 천만 뜻밖에도 삶에 대해 아주 강하게 긍정하며 극을 마무리한다. 


  결론적으로 러스트 콜에 대한 한편의 심리치유극이 되어버린 것인데, 이 드라마의 세련됨과 미려함과는 별개로 조금은 뜬금없는 전개라고 하겠다.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던 인간인(기능은 잘 못하더라도) 주인공 콜은 이로써 존재를 가장 강하게 긍정하는 마치 신앙의 발견과 같은 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극 전체의 종교적인 오버톤(overtone; 이런 식의 외래어 사용은 아주 나쁜 버릇인데 지금 머리가 굳어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마무리인 것 같기도 한데, 허무의 끝에서 허무 가운데서 살아남는 인간을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초라한 엔딩. 하긴 결국 원했던 것은 긍정이니 오히려 다행인 일인가. 


  이렇게 긴 서론을 끌어들인 것은, 이 얼토당토 않은 형사극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존재에 대한 키워드를 생각이나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재'가 우리(와 우리의 연장, 혹은 보다 정확히는 그 역으로 세상의 연장으로서의 우리)의 핵심이라고 한다면(feat. 설익은 스피노자 독해) 그 존재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존재 그 자체가 위협 받을 때이다. 우리는 존재함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고 통상 의문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위협을 감지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본질에 대한 명증한 인식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기실 항상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고 산다면 그건 병적이라고 할 것이므로 사회의 기능하는 인간으로서의 적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위협이 구체적인 객체로서의 나에 대한 것이 아닌 보다 추상적인 군집에 대한 것으로 구성하여 다룰 수 있다면 이는 본질로서의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기능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역할 수행의 병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길을 터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질을 빗겨가는 잡스러움을 피한다고 느끼게 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인 어떤 것과 연계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델이 언제가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닌데 존재에 대한 강박이 있는 사람에게는 나름의 퇴로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좋았다. 중언부언하였지만 사실 나는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기후변화는 우리 중 어느 누구 하나도 빗겨가지 않는 존재론적 위협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굉장히 관념적인 일이였기 때문이다. 존재에게는 목적이란 존재 외엔 없다. 그렇다면 존재의 연장을 논하는 이 주제를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주에 우리가 아는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독립된 개체. (물론 결국 그것은 본질의 연장일 뿐이겠지만) 존재는 무가치하다. 하지만 생명에게는 호/오가 있고 좋은 것과 싫은 것, 득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 즐거움과 즐거웁지 아니함이 있다. 이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존재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다. 그것은 외부와 독립되었으나 외부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란 것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렇다면 존재 가운데서 가장 보존할 만한 것은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총체로서의 생명.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사람은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본성을 가장 세밀하게 인지할 수 있으므로 특히 그 보존에 의해 창출되는 가치가 크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지구적인 생존을 논하는 이 주제가 흥미로웠다.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의 양식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함에 있어서 공통된 존재에 대한 위협 이상의 중요한 계기가 있겠는가?  


  보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군대가 재밌었다. 물론 군 생활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갖은 부조리와 비합리가 즐거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군대는 어쩌면 가장 직접적인 형식으로 존재의 소멸을 다루는 조직이다. 죽음을 전하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인 집단이 달리 또 있는가. 괜히 종교인이 편제되는 조직인 것이 아니다. 물론 내 관념 속의 군대와 실제 군대는 아주아주아주 다른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군을 관통하는 주제가 나(혹은 국가)의 존재의 보장과 적의 존재의 소멸(세부적으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나도 안다.)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면에서 대단위 전쟁의 수행을 들여다보게 되는 전구급 연습훈련은 주로 짜증이 나게 해도 흥미로운 점들이 없지 않았고, 가진 것의 보존과 그것에 위해를 가하는 것들의 파괴라는 로직으로 돌아가는 군 임무 수행에 한참 젖어있을 때에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부차적으로 느껴졌다. 전화의 가운데 소멸해버릴 많은 것을을 쌓아올리고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치고 있는가. 사실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진 것은 다분히 관념적이라서 지금 보면 그냥 웃기기도 한데, 아마도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이런 지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안다. 자신의 삶만을 사는 개별적인 인간이 존재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그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보려고 하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형식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런 소멸의 순간은 흔하지 않고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의문없이 존재해 갈 수 있는 일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기본적 생존이 향상 위협받는 저개발국가 혹은 분쟁지역 거주 시 이는 역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허랑방탕한 경향성을 사회적 기능 수행에 있어서 녹여낼 수 있다면, 허세 가득해진 객체도 사회에 기여할 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기후변화라는 큰 주제 속에서 이러한 망상적 생각과 기능하는 하나의 결여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기후변화라는 주제는 전지구적인 공통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어떤 매개가 되는데 실패하였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 간의 경쟁이 중요하다. 나는 이것의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경쟁하지 않는 사회의 자원의 배분은 어떤 권위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존재를 참으로 재미없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대에 걸친 몰락은 지금 당장의 나에 대한 위협인 것은 아니기에 우리가 사회 전체로서 거시적인 고려를 하게 강제하는 어떤 기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 분야의 일 역시 사회적 분업 구조에서 특정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고, 그것도 매우 마이너한 영역으로 잔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마디로 간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지배적인 담론으로 떠오를 수는 없고, 다만 사회에서 해결해야 하는 여러 문제들 중 (우선순위가 밀리는) 하나의 주제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론적 위협이 촉발한 사회적 대처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협력과 경쟁 등의 대응이 재미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쪽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과 같이 조직된 사회에서 변화의 촉발은 자원을 어떻게 해당 분야로 이전 시키느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자원은 자본의 이동을 좇는 다는 점에서 금융이 가지는 중요성이 있고, 그렇다면 기후변화 분야에서도 기후금용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인데(이에 대해서는 차후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해보도록 하자), 사실, 학점과 변호사시험과 내일을 모를 내 앞날의 가운데에서 저런 생각은 접고 산다. 지적 사치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새해의 시작이라는 센치해저도 괜찮을 것 같은 핑계가 있으므로 간만에 약빤듯 아무말이나 해보았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글은 방학계획 슬라이드 브리핑이 되겠다. 오늘의 만담 //끝//



PS> 

 존재론적 위협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과 추상성에 의해 공통의 대응을 끌어내기 어려움 때문에 '왕좌의 게임'의 백귀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비유라고들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세부적으로 보면 물론 설정 상 대응된다고 보기 어려운 점들도 많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상의 중요성이나 각 개인이 느끼는 바를 부차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사람에게서 느낀다는 것을 앗아간다면, 그리고 그 고유의 왜곡된 정서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객체의 고유성이라는 것은 존재로서의 단일 논리속에 포섭되어 개별성이 없어져야 된다는 결론 뿐이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 써드 임팩트 따위를 추구하는 인간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픽션 속에서) 이런 저런 헛소리를 길게 하였는데, 실천의 단위에 있어서 지극히 현실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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