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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May 18. 2019

로스쿨일기 : 오일팔

1980. 5. 18. 

1. 들어가면서 


넓은 의미에서의 형법은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배제시켜도 되는지에 대한 합의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시민사회가 얻어낸 시민의 자유가 어떤 개인 혹은 집단에 한하여 제한되어도 좋은가에 대한 사회적 판단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정체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은 동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같은 국민임에도 (일시적으로 혹은 제한적 범위내에서는)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국가가 선언하는 것이 공형벌권의 행사라고 생각해. 


벌금형 등에서는 극명하지 않지만, 징역형 등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벌에서는 이런 면이 더 잘 들어난다.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생활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 이른바 '감옥'의 기원과 기능에 대해서는 멀게는 푸코부터 근래에는 형사정책적으로 더 세련된 이론들이 있겠고, 나는 그것들을 알지 못하지만,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들의 격리라는 차원에서 형법은 시민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 간의 선을 긋는 날카로운 칼.  


그래서 우리는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공형벌권의 행사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의 번거로운 절차들을 마련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단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늘 논란이 끊이지가 않는다. 그렇게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일은 민주국가에서는 절대로 가볍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1980년 오월의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통째로 시민임을 부정당했다. 


3. 오월의 광주에서, 1980 


고등학교를 마친지 나도 이제는 꽤 오래되어서, 지금의 교육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중 오일팔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학교 동기들과 그저 놀려고 떠난 남도여행에서 광주를 들려 잠깐 거쳐간 5.18. 국립묘지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그날의 이야기들은 정말 충격이었다.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지? 그리고 왜 이런 것에 대해서 나는 그 시대 역사 속에서 배우지 못했지? . 군인들이, 어떻게 국민을 상대로 총질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지?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에 대한 순진한 믿음이 아직 있던 대학교 1학년 새내기가 접한 충격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2. 국가가 마땅히 처벌해도 좋은 악인들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의 체제에 익숙하던 시대에 그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선량한 시민'과 구분되는 일련의 '과격세력' 또는 체제 전복을 도모하는 '사회불안정세력'등으로 보고 이들의 무력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한국이 지금처럼 북한에 비하여 경제, 문화, 사회,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나타낼 때도 아니었고 지식인 가운데 자본주의-민주주의 기반 체제를 부인하고 사회주의의 이행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인데, 이념의 대립이 실제적 의미를 가지던 당시에 이에 방어적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경제적 성장과 안정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체제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을 위해 일하던 군인, 경찰, 정보기관 등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들의 생각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해도, 왜 그런 입장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들이 이것을 진심으로 애국임을 믿어의심치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가 공리적인 목적으로 제한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완전히 이를 긍정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 실제적인 필요성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다음 논의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견해의 날 선 대립이 있게 마련이고 그 스펙트럼의 극단에 서게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짐작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시민들 가운데 비시민을 분류해 내고 그들을 체계적으로 축출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물론 그 전부터 권위주의 정부가 일체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서 해오던 행태였다.  민주화 세력 등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비시민으로 취급되었고 정보기관, 검찰, 군부, 그리고 사법부 마저 하나가 되어 이들을 사회에서 배재하기 위하여 단결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신군부와 그 휘하 세력들이 자행한 것은 그 틀에서조차 정당화 될 수 없는 짓들이지 않았는가. 신군부의 권력 탈취와 정국의 주도권 잡기를 위해서, 한 시대의 종언을 선언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집단에 대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한 살인이 허용되었다. 그들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를 고립시킨 순간, 그들은 시민집단 하나를 통째로 사회로부터 배제시켰다. 이 판단은 오직 군부의 정무적인 판단이었고, 그것에 대하여 민주국가가 정당성을 부여한 바가 없다. 그렇게 통제되지 않았으나, 권력 상실의 두려움에도 빠져있던 군부는 자신의 그 불안감을 잔학성으로 표출하였다.  


시민을 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국가는 과연 국가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러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시민 가운데 누가 배제의 대상이 되어도 좋은지에 대한 판단을 군부가 내리고 그것을 극단적 방식으로 실천에 옮겨도 좋은가? 계엄령 하에서는 그러한 행동들이 허용되는가? 그것을 허용한다면 이를 민주국가라 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사법부의 견해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소수라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을 가진 개개인보다 조금 더 미운 것은, 앞의 논의들을 이해함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면서도, 짐짓 이를 모른 척 하며 세불리기 위해서 그와 같은 견해에 동조하고 힘을 유지하게 해주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일 것이다.  퇴행했다고 해도, 더 이상 군부나 독재세력이 재등장 할 수 없을만큼 견실해진 한국의 민주주의에게 여전히 광주가 여전히 울림이 적지 않은 이유도 결국 그것이지 않을까. 시민으로부터 비시민을 자의적으로 갈라내어 이들을 적대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한국사회는 군부 뿐 아니라 어떠한 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통치도 어려워졌을 만큼 정치민주화가 진척되었다. 지금도 부족하겠지만 국가가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하지만 더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을 망정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을 우리 안의 시민과 비시민의 가름에 대한 개개인의 판단들 역시, 극단적 형태로 표출되지 않는다고해도,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5.18의 정신을 논할 자격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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