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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Sep 30. 2019

로스쿨일기

섬여행

8모 끝나자 마자 떠났던 섬 고립기. 


0. 섬으로 떠나다

나는 로스쿨 3학년생이다. 3학년은 로스쿨의 마지막 학년으로, 내년 초 졸업 예정이고 곧 있을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극한 수험생활의 대명사라고 할 ‘고3’에 비유하여 로스쿨 재학생들 간에는 이 시기를 ‘로3’이라고 부를 만큼 정신없는 때이지만 조금은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수험생에게도 이따금 공부하지 않고 버리는 시간이 생기는데, 나는 8월 둘째 주에 있을 변호사시험 모의고사를 보고 난 뒤 쉬고 싶기만 할 주말을 이용해서 잠깐 모든 것을 떠나 있다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백패킹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어디로 갈까 찾아보니, 국내 백패킹 3대 성지라는 선자령, 영남알프스, 굴업도가 나온다. 여행의 백미는 역시 바다구경이 아닐까. 나는 굴업도가 가장 관심이 갔다. 더 찾아보니 굴업도는 서울에서 출발해서 가기도 멀지 않아 짧은 일정으로 백패킹을 하기엔 적소라고 보여, 망설일 것 없이 목적지로 정했다. 하지만 그때는 계획했던 1박2일의 짧은 일정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3박4일의 제법 긴 휴양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서는 우선 굴업도까지의 동선과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굴업도는 인천의  서쪽에 있는 섬으로 덕적도, 소야도, 문갑도 등과 함께 덕적군도에 포함된 섬이다. 인천에서 굴업도까지는 바로 가는 배는 없고, 덕적도를 거쳐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배 시간을 잘 맞춰야 하는데, 특히 덕적도에서 굴업도로 가는 배는 주말에는 2편씩 있지만, 주중에는 1편만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덕적도-굴업도 간 페리인 ‘나래호’는 홀수날에는 덕적군도의 여러 섬 중 굴업도를 먼저 들리기에 1시간 만에 도착하지만, 짝수날에는 다른 섬들을 먼저 들리고 돌아서 가기에 2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이러한 점도 잘 고려해서 일정을 짜야 한다. 나는 주말 이틀을 이용해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짝수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덕적군도의 여러 섬들을 구경하면서 갈 수 있어서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승선권은 해운협회에서 운영하는 ‘가보고 싶은 섬’ 웹사이트를 통해서 간편하게 예매가 가능했다. 모바일 앱도 있기 때문에 여객선 일정 확인 및 예매가 굉장히 쉬웠다. 일요일 오전 11:00에 인천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해서 12:10경에 덕적도에 도착, 덕적도에서는 12:50에 출발해서 15:00경에 굴업도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우선 가는 배편을 예매하였다. 그리고 다음날굴업도에서 아침 10:30에 출발해서 덕적도에 12:30쯤 도착하고, 덕적도에서는 13:00에 인천연안여객터미널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배편을 예매하였다.


2. 그 섬에 가는 길: 혼자, 따로, 또 같이

여행 출발 이틀 전,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자신의 결혼 전 상견례 일정이 당겨졌다며 같이 섬으로 여행을 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혼자서 다녀오게 되었지만 잠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때부터 조금씩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고, 이 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련들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출발 당일 아침,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 일찍 도착하여 여유 있게 대기하다가 오전 11:00에 덕적도행 배를 탔다. 창가 자리에서 바다를 보니 마음이 들뜬다. 배는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정말 얼마 안 있어 덕적도에 닿았다. 배를 갈아탈 때 주의할 것이, 하선해서는 방금 내린 부두 말고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페리 부두로 가야 한다. 굴업도행 페리가 오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서두를 것은 아니었지만 초행길인 만큼 미리 가서 준비하고 싶었다. 


덕적도-굴업도 구간 표는 덕적도에 있는 현장사무소에서 발권 받았다. 그 때 딱 보아도 나처럼 혼자 온 것 같은 다른 여행객 분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로 가세요?” 나는 굴업도로 간다고 답하고,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다. 그 분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왔는데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 분도 굴업도 표를 끊었다. 섬에서도 계속 마주칠 것 같아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매표소 밖으로 나와 잠시 부두 근처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부두 근처 매점 앞에서 그 분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넨다. 날도 매우 더웠던 터라 감사히 받아먹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배가 뜨지 않아서 섬에서 예정보다 이틀을 더 보내면서 이분과는 서로 의지할 친구가 되었다. 아무튼 이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신나 있었다. 


얼마 뒤 부두에 ‘나래’호가 들어왔고 나는 배낭을 다시 메고 배에 올랐다. 굴업도 가는 배에서 바라본 바다는 너무 아름다웠다. 쾌속선은 빠르고 편해서 좋았다면, 굴업도로 가는 페리는 그  쉬엄쉬엄 섬마다 들리며 돌아가는 바닷길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았다. 아직까지 잔잔한 바다를 넋이 나간 듯 보다 보니 2시간이 금방 지나 어느 새 굴업도에 다 왔다. 


3. 개머리언덕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굴업도는 10여 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섬인데, 주민 분 중 많은 분들이 민박집을 운영하신다. 부두에 내리면 기다리고 계시다가 민박집들이 있는 해변가까지 트럭으로 태워주시는데, 먼 거리는 아니지만 길도 잘 모르고 또 언덕 경사도 제법 있으므로 좀 쑥스러워도 타길 권한다. 따로 돈을 받으시지는 않지만 태워주신 민박집에서 묵거나 밥이라도 먹는 방법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다.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이 펼쳐진 개머리언덕에 텐트를 치고 잘 예정이었으므로 나를 태워다주신 ‘장할머니 민박집’에서 다음날 섬 나가기 전의 아침식사를 미리 예약 해 놓았다. 


굴업도에 도착해서는 앞서 덕적도 매표소에서 말을 튼 내 또래의 그 친구와 함께 트럭을 타고 들어왔다. 굴업도에 온 목적은 풍광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개머리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텐트치고 놀다가는 것이었던 만큼,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개머리언덕으로 갈지 조금 고민하고 있었는데, 해변가 앞 민박집에서 마침 라면을 끓이던 다른 여행객 분들이 어디로 가냐고 물으신다. 개머리언덕에 갈 예정이라니까 지금 해물라면을 끓이는데 가기 전에 먹고 가지 않겠냐고 하신다. 보니 물이 펄펄 끓는 냄비에 직접 잡으셨다는 게가 열 마리는 들어있다. 와, 섬에 내리자마자 게로 끓인 해물라면이라니. 나는 덕적도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염치불구 짐을 잠시 내려놓고 둘러앉았다. 라면을 끓어주신 분은 이 섬에 매년 오신다는 ‘서씨’ 아저씨셨다. 굴업도가 너무 좋아 매년 오신다는 아저씨는 이번에는 친구 분도 불러서 같이 섬에 오셨다는데 두 분다 매우 유쾌하고 좋으신 분들이셨다. 그런데 금방 끓인 라면에 곁들어 소주를 내오신다. 이렇게 귀한 라면을 얻어서 먹는데 주시는 술을 마다하기 죄송스러워 나는 주시는 대로 연거푸 받아마셨다. 그렇게 오후 세시 반부터 여섯시 반까지 덕적도 매표소에서 사귄 친구와 함께 앉아서 받아 마신 것이 각자 적어도 열댓 잔은 될 것 같았다. 병으로 치면 소주 한 병 반에서 두 병 사이였을 것이다. 내 주량으로는 만취할 만큼이다. 


해가 기울어가는 것이 느껴져서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개머리언덕에 텐트를 치고 지는 석양과 뜨는 태양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얼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5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다시 들쳐 메고 만취상태로 언덕을 올랐다. 


굴업도 큰말 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개머리언덕 입구를 통해 들어서면 우선 가파른 경사도의 언덕이 나온다. 그 첫 언덕을 넘고 나면 능선을 타고 이동하다가 또 가파른 언덕이 나온다. 낙타등 같은 두 번의 언덕을 넘고서야 개머리언덕의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다. 취해서 정신없는 채로 그렇게 개머리언덕의 끝자락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해도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가져가는 텐트는 새로 사서 처음 쳐보는 텐트. 게다가 언덕에는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만큼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아마도 저 밑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고 있던 태풍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술은 취했고, 처음 보는 텐트 설명서는 눈에 안 들어오고, 해는 점점 지고 있고, 바람은 너무 심하고, 몸은 종일 이동해서 피곤하고 나는 도저히 이 상태로 텐트를 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 포기하고 일단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닥에 캠핑용 매트를 깔고, 침낭을 덮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하늘 아래 그대로 잠이 든 것이었다. 해가 진 개머리언덕에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고, 무릎 정도 까지 오는 잔디들을 곁에 한 채 머리맡에 배낭으로 바람을 막고 침낭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잠이 들었다. 나는 침낭의 지퍼를 채울 정신도 없어서 정말 이불처럼 덮고 잤는데, 잠이 깊이 들어 침낭을 놓칠 때마다 거센 바람에 침낭이 펄럭거리는 바람에 깊이 잠이 들지도 못했다. 서해의 섬 언덕 위의 낯선 하늘아래 그렇게 때 아닌 노숙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나는 혼자서 속으로 큭큭 거리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어보니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비만 안 내리길 기도하며 다시 잠들었다가 또 깨어보니 이번에는 구름이 걷힌 채 촘촘히 박힌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풍광에 감탄하며 여전히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를 벗하여 다시 잠들었다가 또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저 멀리 조금씩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내가 이 섬까지 들어와서 바람을 맞으며 별을 바라보며 하늘을 머리에 이고 밤을 보내다니. 이 것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노래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을까. 내가 섬에 들어올 때 그렸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이것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네. 아마도 오늘로 인해서 나는 굴업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그리고 또 오게 되지 않을까? 


4. 섬을 떠나지 못하다

이튿날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배낭을 꾸려서 터덜터덜 바람에 밤새 시달린 몸을 이끌고 개머리언덕을 내려갔다. 너무 일찍 일어난 지라 아직 아침식사 까지는 시간이 비어서 섬을 조금 돌아다녔다. 그런데 배 뜨는 상황을 확인해보는데 심상치 않다. 태풍을 중국으로 향했지만 그 바람의 간접영향으로 서해 쪽은 파도가 거셌다. 사실 섬에 들어올 때 터미널에서 직원분이 오후에는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오는 배가 뜨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는데 나는 이것을 내 멋대로 그럼 오전 배는 뜬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전에 굴업도에서 덕적도로 나가는 배를 타야 했고, 덕적도에서 인천으로는 오후 배 일정이었다. 그러니까, 말씀해주신 대로 생각해도 들어올 때 이미 나올 수 없는 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섬에 어떻게든 들어오고 싶었던 나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고, 덕분에 태풍으로 덕적도보다 먼 바다에 있던 굴업도에까지는 배가 뜨지 않아 아예 굴업도를 떠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인 월요일에는 학교에서 특강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이 모든 일이 내 탓임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웠다. 어찌해야 고민하고 있었지만 확인해보니 정말로 오늘은 굴업도는 아예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시간이 되어 민박집에 예약해 두었던 아침식사를 어제의 친구와 하고 이제 떠나지 못한 이 섬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어제의 친구와 섬 구경을 조금 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티비 방송을 하고 있다던 그 친구는 무인도 생존기를 주된 테마로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개머리언덕의 반대편인 굴업도의 묵기미해변과 붉은머리해변으로 향했다. 태풍의 간접영향권이라고는 하지만 하늘은 맑기만 하였다. 바람은 조금 있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푸르기만 하였고, 햇살이 비치는 섬은 아름답기만 했다. 물 한 병을 챙겨서 나선 길에 햇살에 반팔 반바지 아래 팔다리가 기분 좋게 탔고, 떠날 생각을 버리고 나니 오히려 섬을 더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개머리언덕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오히려 아침에 그대로 섬을 떠나버렸다면 굴업도를 반의반도 모르고 갔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섬 구경을 하고 나니 점점 다시 배가 고파져서 오후에는 다시 민박집이 있는 해변가로 돌아왔다. 나와 그 친구는 태풍이 더 가까이 온다는 이날 저녁은 밖에서 텐트치고 자는 것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하여 민박집을 잡았다. 그래도 오늘은 바람을 막아줄 벽과 지붕 아래 자겠구나 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모험을 찾아 와서도 조금이라도 더 안락함을 찾는 자신이 조금은 웃겼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섬에서는 주변 구경 말고는 나는 할 일이 없어 보였지만 그 친구는 게도 잡고 해안가 바위의 굴도 따고 분주했다. 바다도 섬도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친구가 잡아온 굴을 까서 튀김을 해먹고 게를 넣어서 라면을 끓여먹고 우리는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섬에서의 밤은 도시에서보다도 빨리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어두워진 섬에서는 그다지 바삐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찾아 먹기고 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굴업도는 배가 뜨지 않았다. 덕적도는 배 운항이 재개되었지만, 굴업도까지 오는 페리는 아직은 풍랑 때문에 운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수험생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섬을 헤엄쳐 나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고3 만큼이나 바쁜 로3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체념하고 나니 얼른 나가야만 할 것 같은 애타는 마음은 조금 사그라졌다. 내일은 반드시 나갈 수 있으니 차라리 오늘은 마음 편히 쉬는 것이 남는 일일 터였으니까 말이다. 


이날은 첫날 올랐던 개머리언덕을 더 자세히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해물라면을 끓여주셨던 섬에 매년 온다는 ‘서씨’ 아저씨께서는 마침 같이 고립되었던 다른 여행객분들과 함께 파도 구경도 하고 개머리언덕 구석구석 구경도 할 겸 오전 중에 언덕을 오르신다고 했다. 기회다 싶어서 나는 여기에 껴서 같이 따라가기로 했다. 개머리언덕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라서 그 아름다움을 다 즐기지 못했는데 서씨 아저씨는 정말 세세한 굴업도의 풍광들을 다 알고 계셨다. 덕분에 코앞까지 몰아치는 곳도 보고 힘들게 올랐던 언덕을 돌아가는 길도 배우고, 또 첫날은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굴업도의 명물, 사슴떼도 볼 수 있었다! 한 두 마리도 아니고 거의 스무 마리 가까운 사슴들이 바로 언덕 너머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우리를 같이 구경한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들. 첫날 바로 떠났으면 절대 몰랐을 개머리 언덕의 풍경들. 하나를 잃으면 또 얻는 것도 반드시 있는 것인가 보다. 굴업도에서의 표류는 나에게 이런 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때때로는 조금은 천천히 가도 좋다는 것까지도.  


개머리언덕의 구석구석을 돌고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나는 조금 여유 있게 챙겨온 식재료도 떨어지고 라면도 이제 지겨워져 가던 찰나에 같이 고립되었던 여행객 분들이 준비해 오신 밥이랑 찬으로 같이 식사하겠냐고 물어봐주신다. 나는 이번에도 염치가 없게도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얻어먹었다. 심지어 오리로스까지 있었는데 다들 많이 드시지 않아 결국 내가 제일 많이 먹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감사하고 조금은 죄송한 마음에 설거지는 내가 하였다. 덕분에 마지막 날 저녁은 라면으로 때우지 않고 그럴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는 오늘은 따로 섬 구경을 다녔던 내 또래 친구와 방에서 조금조금 이야기를 하다가 금방 어두워진 섬에서 피곤한 몸을 누인 채 곧 잠이 들었다. 


이건 여담인데, 굴업도의 민박집들이 있는 해변가에는 간단한 식재료와 식수, 음료수, 맥주 등을 파는 매점이 있다. 심지어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준비되어있다. 그래서 사실 조금 모자라게 들고 가도 충분히 섬에서 다 구할 수 있다. 캠핑용 버너 가스 등도 있어서 굳이 뭍에서부터 무겁게 챙겨가거나 여분을 과하게 가져갈 필요는 없다. 또, 해변가에는 공용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는데 섬 여행객 누구나 무료로 사용가능한데 꽤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사용하기가 아주 좋다. 샤워장은 물론 찬물만 나오기는 하는데 여름에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텐트랑 침낭 정도만 챙겨서 가면 여름에는 더 필요한 게 없을 정도로 잘 갖춰진 곳이었고, 아직 이 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 민박집들이 인접해 있는 큰말해수욕장은 길이도 길고 모래사장의 넓이도 넓고 아주 깨끗하고 고운 뻘이 있어서 여름 물놀이하기에 정말 좋은 곳인데 단지 배를 조금 타고 들어와야 해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곳이 더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너무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보석으로 계속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5.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섬에 들어온 지 4일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배가 뜬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내가 원해서 왔고, 너무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은 섬이었지만 할 일 가득한 일상으로 얼른 돌아가야 했기에 배가 온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굴업도를 떠나는 배는 12시 반 쯤 섬에 도착했다. 이날은 이제는 떠나야하는 이 섬을 아침에 쉬엄쉬엄 돌아다니다가, 짐을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하였다.  굴업도에서 다시 2시간 배를 타고 덕적도로 나갔다. 바닥이 평평한 페리선이 파도에 휘청휘청할 만큼 아직 풍랑이 다 가라앉지 않은 바다를 지나 덕적도의 가까운 바다로 가니 파도는 조금은 더 잔잔해졌다. 가는 길에 섬에서 같이 민박집을 나누어 쓴 내 또래 친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아프리카 티비 촬영을 충분히 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덕적군도 중 하나인 ‘지도’에서 내렸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조금 더 배를 달려 도착한 덕적도는 햇살이 뜨거웠다. 며칠간의 섬 생활에 나는 새카맣게 타버렸는데 피부에 닿는 햇살이 유독 더 따갑게 느껴졌다. 


한 여름 밤의 꿈같았던 3박 4일. 이제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오는 쾌속선에 오르기만 하면 육지로 향한다. 태풍이 온다고 해도 서울까지 돌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 육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간다니 아쉬운 마음이 절반, 안도감이 절반 들었던 것 같다. 덕적도에서 인천행 배는 한 시간여 만에 인천연안부두에 닿았고 나는 실감나지 않는 발걸음을 디뎠다. 연안부두 앞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걸음을 되짚어 오는 길에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여유 있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던 섬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마음의 여유는 없는 로3으로 돌아왔지만, 서해 굴업도에서의 스쳐가듯 아름다웠던 풍광과, 태풍에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며 간절히 돌아가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만은 간직한 채 남은 한 해를 마무리하리라 다짐했다. 이 모든 것은 한 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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