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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Nov 26. 2019

로스쿨일기

자꾸 나를 겸손하게 만들지 말아요

2012년 2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밍기적거리던 생활을 청산했다. 그렇게 수확없이 보낸 몇년을 정리하며 사법시험을 그만두었다. 공부하는 척 하며 보낸 시간들은 너무 아깝게 지나가버렸지만, 그래도 그 때 했던 (공부 이외의) 허튼 짓들이 의외로 삶의 밑바탕이 되어주었으므로 후회는 없었다. 나는 관성의 인간이라 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그것을 벗질 못했는데, 조금은 강제적으로 끼어맞추어 입으려던 옷을 벗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길을 모색하면서 보낸 그 해는 의외로 즐거웠다. 2012년 그 해, 하려고 했던 일들은 다 원하는 대로 풀렸으니까. 한창 연애도 잘 하고 있었고, 모교가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내가 가기에는 넘치는 꽤 괜찮은 로스쿨에 합격했고, 더는 미룰 수 없던 군복무도 통역장교 시험을 보아 합겼했고, 내가 원하는 진로라고 생각해서 참석했던 국제환경전문가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큰 틀에서의 방향성도 얻은 것 같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보낼 수 있던 한 해였다. 그 때, 나는 법대를 벗어나서 지내면서 '아 내가 시험공부는 멍청이여도 조금만 벗어나면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낙관. 


2013. 3. 

그 전 해가 전환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면, 2013년은 그 해의 약속들을 실천으로 옮기는 해였다. 나는 로스쿨에 입학했고, 바로 군휴학을 하고 입대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나는 2013. 3. 18.의 진해. 입대할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전년도에는 뭐든 원하는 대로, 뜻대로 되어서 잠깐 우쭐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임관 후 그 당시 만나던 연인에게 이별통보를 듣고 나는 다시 겸손해졌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주 잠깐 운이 좋았던 한 해를 보내면서 우쭐한 마음이 들었던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자라나오던 오만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 싹은 싹둑 잘라져버렸다. 


통역장교는 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고, 지휘부와 연계되어 있으니 왠만해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았다. 비교적 자유롭다고 해도 군대는 군대고, 계급으로 움직이는 조직의 최말단 장교에게는 별다른 권한도 없고 그렇다고 책임을 물을 자리도 아니었으나 민감한 업무들이 많으니 부담감은 상당했다. 그리고 군대 안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공룡처럼 낡아버린 사람들이나 명예를 빼면 남을게 없는 조직을 일신의 영달을 위한 도구 쯤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역겨운 마음이 들어 도저히 견디기 힘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병이든 간부든 단기자원들은 조직에 크게 뜻이 없게 마련이고, 그렇게 최소한만 하고 나가려는 사람들 틈에서 잘한다고 인정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이 일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아주 조금의 성실성만 가지고 일한다면 'A급'이라고 평가 받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특히 통역처럼 단기자원들 간에만 비교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더 그랬다. 그래서 그 때 나는 내가 정말 이른바 'A급'인줄 알았다. 이별통보를 듣고 겸손해졌던 마음이 어느새 다시 교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2016. 6. 

3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했다. 막상 나가려니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다. 정말 사무실에 가기도 싫을 만큼 스트레스 받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해야했던 업무 그 자체는 좋아했던 것 같다. 재미없지 않은 일들이었고, 그 소소한 속내를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가서 말은 못해도 꽤 흥미로운 일들이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과는 작별해야 했기에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게 나와서 입학전까지 무려 8개월 가량 시간이 남아서 무어라도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히 우연히 나간 학부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국내에서는 드물게 기후금융 관련 일을 하는 곳의 인턴 자리를 알게되었고, 친구의 레퍼를 받아서 인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재미있었다. 같이 인턴하게 된 동기들도 좋았고, 주어지는 업무도 재미있었다. 인턴에게도 실제 실무를 일부 맡겨주셨기에 생각보다 현업을 잘 경험해볼 수 있었다. 내가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일하신 실무자 분들에게도 인턴이 아닌 실무자 같다고, 한 3, 4년차는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실제로 군에서였지만 실무 경력이 3,4년차였으므로 이는 칭찬이라고 할 것이 못 되었다.) 당시 그 본부의 장님에게도 인정 받으면서 어쨌든 내가 군에서만 잘한다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 사기업에서도 인정 받을 수 있는 인재라는 생각에 또 역시 나는 'A급'이 아닌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었다. 


2017. 3. 

그렇게 한껏 도취된 마음으로 복학한 학교. 여기서 나는 도로 겸손해졌다. 내 동기들은 다들 똑똑했고, 나 정도하는 사람은 흔하디 흔했다. 시험보고 공부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자기 미래를 위해 기를 쓰고 달리는 이 곳에서 나는 정말 널리고 널린 흔한 사람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는 'A급'이라 생각한 내 자신이 도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우쭐거리는 마음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딜가도 왠만하면 남들보다 맞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자료를 정리해도 더 깔끔하고, 업무이해도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나만큼 못하는 사람을 찾는 편이 더 빨랐다.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잠깐이라도 내 멋대로 나보다 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일이었는지 싶어 혼자서 부끄러웠다. 아무튼 여기서는 고등학생 때, 시골에서 갑자기 서울로 특목고로 진학하고 느꼈던 막막함과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하지만 오히려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기에, 그다지 충격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새로울 일은 아니었으니까. 


2019. 11. 

그렇게 이제 나는 변호사시험을 40여일 앞두고 있다. 이 시험을 넘겨야 어쨌든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문득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인가. 다만, 내가 조금이라도 오만한 마음이 들 때가 되면 그렇지 못하게 항상 차단해주는 일들이 있었으므로, 이번 만큼은 그냥 한 번에 무탈하게 이 곳을 탈출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남은 시간들을 물론 내가 잘 보내야겠지만, 다시 하고 싶지 않는 이 시간들을 반복하지 않게 해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이 곳을 떠나고 싶다. 다시 사람처럼 살게 될 따스한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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