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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Jan 18. 2020

코멘터리

01. 기후변화 담론이 죽어버렸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결과 기다리기 쫄려서 드는 잡생각. 01. 


나는 기후변화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거대)담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후변화는 사실 “기후불안정성 증가” 정도로 개념화 하는게 더 정확한데, 어쨌든 인간이 속한 지금의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환경을 제공하던 지구적 차원의 기후(매번 변동하는 날씨와는 다르다, 날씨와는)의 불안정성이 인간기여요인으로 인해서 증대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주제는 국가 간의 경쟁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고, 반드시 상호 협력에 기반해서만 대처할 수 있는 문제였고, 팽창적 경제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해결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본질'에 대한 논의였기 때문에 기후변화(혹은 기후불안정성증가)가 우리 시대의 지배적 담론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기후변화 담론은 그대로 죽어버렸다. 물론 일부 개념적 요소는 살아남아있다.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에너지의 효율적 사용, 소비적 경제체제에 대한 경계 등등. 그런데 사실 이건 팽창(해야만)하는 경제의 주변적 요소들을 건드리는 것일 뿐 우리가 생산과 소비를 하는 방식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거대담론'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 지금과 같은 경제/사회체제는 인간의 의지로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발전해나온 것들을 일부 제도적 틀을 통해서 관리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통제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의 ‘본질'을 인간의 의지로서 바꾼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고는 대처할 수 없는 공동의 문제였기에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런 부분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도 없었다. 당장 나를 예로 들어볼까. 사실 구조의 문제에서 개인의 행위를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의 연간 개인 CO2 배출량을 검증해보면 아마 어마무시할 것이다. 나는 하루에 15분 이상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종종 전기를 그냥 켠채로 집 밖을 나서고,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방에 있을 정도의 온도로 난방을 하고, 집에서 통학할 때는 심지어 디젤차를 운전해서 다녔었고,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일회용품과 포장재 등 쓰레기를 배출하고, 오직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여행이라는 미명하에 몇천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그런데 나는 결코 이런 생활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사람의 삶만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삶은 누구나 살 수 있게 하고자 함이 공동체를 위한 목표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 정도로 사는 삶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정도는 다들 알아듣지? 왜냐면 지금 나는 백수에 반거지적 상태인건 나도 잘 아니까)  


아무튼 개인으로서 나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기후 불안정성 증가에 기여하고 있지만 내가 개인으로서 (내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 많지 않다. 이것은 대부분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고, 그렇기에 거대담론으로서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더디고, 신재생에너지로 전환된다고 해도 각각의 신재생에너지원들의 환경영향이 0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경제적 성장의 둔화를 견디면서까지 이 문제에 대처할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문제해결은 무엇보다 시간싸움이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선택지는 제약을 받는다.  


팽창적 경제는 경제 수축의 충격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기후변화의 제문제는 사실 우리의 경제규모가 계속 팽창(해야만)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잠시도 성장을 멈출 수 없다. 성장을 멈추게 되면 당장 가장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외부충격에 취약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민주국가에서는 이들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키는 결정을 할 수 없고(그것은 온당하지도 않고), 이들의 소비력이 감소되면 전체적으로 경제가 둔화되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그 영향을 느낄 수 밖에 없고, 누구도 지금보다 못 살아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역행하는 결정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온실기체 배출로만 논의를 한정해도 우리가 성장하는 경제 규모에 비하여 극적으로 온실기체 배출을 줄이기에는 신재생에너지의 온실기체 발생 에너지원 대체율은 너무나도 저조하고, 오히려 배출량은 매년 증가추세고, 가끔 들려오는 승리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에서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정치쟁점화 되면 삶이 피곤해진다. (이건 사실 김00군이 모 교양 수업을 듣고 와서 해준 이야긴데 심금을 울려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마음놓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담론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은 개개인에게 이렇게 피곤함을 유발한다. 이것이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생산/소비/분배의 영역에서 정치-경제 쟁점화하면 그 전에는 그냥 할 수 있었던 것들도 모두 정치적 경제적 비용으로 환산되어 부담하게 되는데 이것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이것을 하기 싫다고 뛰쳐나간게 트럼프의 선택이었고, 미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자기들의 버블에 갇힌 미국 민주당은 미국민들의 마음을 되찾아올 가망이 없고 세계경제의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이 주도하지 않는 담론은 의미가 없고, 중국은 적당히 자국이익이 되는 선에서 신재생에너지 기술 투자 정도에 머물러있고, 누구도 자기가 희생하고 싶지는 않고, 우리는 이렇게 삶의 터전을 불태우고 있고, 나는 전기를 낭비해가면서 아무 의미 없는 이런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 공간에 이렇게 배설하듯이 써대고 있고, 이 것 땜에 어딘가에서는 서버를 식히려고 또 전기가 들어가고 그렇게 우리는 모두 지구를 함께 불태워 없애고 있고. 


그럼에도 내가 이 바닥의 일을 하고 싶은 것은 (기회가 주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일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어쨌든 파국을 연기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필요하다는 생각이고, 파국이 닥쳤을때 그래도 그 영향을 완화해야 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이것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느낄 답답함이 예상되어서이고, 역시 육첩방은 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이 분야에서 일하기 위한 어떤 자격 요건들을 조금이라고 갖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고, 거대담론이고 뭐고를 떠나서 나는 내 밥벌이는 하고 살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고, 지난 주에 본 변호사시험은 붙는 건지 떨어지는 건지 확실히 얘기도 못하겠고, 개인적 불확실성과 구조적 불확실성이 모두 충만한 가운데 제한적인 선택지 가운데 그래도 개인으로서 내게 만족감을 주는 (혹은 죄책감을 더는) 항목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일 뿐이다. 그것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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