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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Jan 31. 2020

로스쿨 일기

권태로움


시험이 끝난지 이제 3주 남짓 되었다. 1월 11일 토요일에 시험이 끝났고, 그날 바로 채점 할 생각은 없었는데, 먼저 채점하고 얼른 해보라는 동기의 재촉에 얼떨결에 밤 열한시경 당일에 채점을 했다. 다행히도 객관식은 조금 안정적인 점수가 나와주었는데, 사실 사례형과 기록형에서 얼마나 점수를 이득 또는 손해 보았을지 알 수 없어서 여전히 합격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은 약간의 불안한 평화를 즐기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문득문득 불안해지기는 해도, 이래저래 수험공학적으로 따져보면 '이 정도 했는데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지금 온전히 이 평화를 즐기지 못하는 진짜 원인은 불합격에 대한 공포는 아니다. 오히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막상 시험이 딱 끝나고 나니 갑자기 내 앞에 꼭 해야할 일들이 사라졌다는 사실. 


돌이켜보니 살면서 해야만 할 일이 없거나, 다음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채 공백기를 보내본 적이 없다. 중간 중간 강요된 휴식기가 있기는 했으나, 다음 할 일은 정해진 채였고 그 칸을 채워 나가는 정도의 문제지 다음 그림을 백지에 그려야 했던 경우는 없었다. 지금은 어제까지 뺵빽히 채워가던 공책을 다 버리고, 도화지 한 장을 받았는데 무얼 그리면 좋을지 모르겠는 그런 상태에 있다. 


물론, 그럼에도 할 일은 많다. 주짓수도 등록했고, 헬스장도 끊었고, 일주일 내내 빡빡하게 사람 약속도 잡혀있고, 올라오는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도 쓰고 있다. 시험 끝나고 바로 다음 주는 고통스러웠던 수험생활로부터 회복하느라 시간이 금방 갔고, 그 다음 주에는 조금 정신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또 시간이 금방 갔다. 설에는 본가에서 가족들은 시골로 내려가고 나는 집에 남아서 강아지를 보았고, 설이 지나고 나니 또 약간 잡힌 약속들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이제는 시험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고 얘기할 수 없어서 정말로 다음을 천천히라도 생각해야 할 때라서, 시험 결과에 대한 것과는 다른 불안감이 든다. 다음 내 삶은 어디로 가는가? 


성적 좋은 선배들도 막상 원서쓰기 시작하니 도대체 답이 오지 않아서 답답했다고 하는데, 이후의 그림을 그릴때 잔잔한 것 같은 이 바다에 겨우 물에 뜨는 무동력선 하나에 얹힌채 손으로 노를 저어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에게는 굳건한 나침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서남북을 알더라도 어디로 가야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는 막막한 느낌. 게다가 아직 수험 생활의 여파로 눈이 틔이지 않은 것인지 안개가 잔뜩 낀 바다에 나가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변호사협회 채용 페이지에 올라오는 펌 중에 그래도 나와 핏이 좋은 (혹은 조금이라도 나를 더 원해줄 것 같은) 펌들 위주로 자소서를 써보고 있는데, 손끝에서 글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데 막상 그건 잘 되지도 않는다. 산문을 잘 쓰는 능력은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학교 성적이 특출난 것도 아닌데 영어 조금 하는 것 외에 내가 가진 장점이 뭔가 싶기도 하고. 쓰다보니 그 전에는 나도 꽤 똑똑했던 사람인 것 같은데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배경 이야기 정도는 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이 크게 의미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 나보다 더 적격인 사람이 다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조금 들고. 


아무튼 시험이 끝나면 꽃길만 걸을 것 같았는데, 언제라도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급류를 지나오고 나니, 해무가 가득 낀 고요한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느낌이라, 일단 당장 힘들지 않아서 좋기도 한데 막막하기도 하다. 차차 자소서도 쓰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계획해보고 하면서 지내야겠다. 오쓰!!


아, 그리고, 이제 이 카테고리에 로스쿨 일기라고 글 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전에 로3생활 타임라인을 정리해보는 글을 한 번 써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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