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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May 01. 2020

로스쿨일기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로스쿨 일기는 이로서 마지막 장을 맞았다. 아마도 글은 계속 쓰겠지만 이제 더 이상 로스쿨 일기라고는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당분간은 백수일기가 더 적합한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본 것은 약 세달 반 정도 전이었고 발표가 난 지는 이제 일주일이다. 그런데 벌써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래전의 일만 같다. 아득히 먼 옛날에 겪었던 일 같이 느껴진다. 시험은 준비하는 과정이 아마도 너무 끔찍히 힘들었어서 잊고 싶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고, 변호사시험 합격은 그냥 얼떨떨하고 실감이 잘 안나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합격자 발표 날 이번에 같이 시험을 본 친동생하고 밖에서 같이 있었는데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난 발표를 보고 동생이 먼저 확인하고 나도 합격했음을 알려주어서 나는 손 떨며 내 이름을 찾아 내려가는 수고로움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스스로 확인해야 했으면 너무 심장이 떨렸을 것 같은데 다행히 한번에 남의 손을 빌려 확인하여 마음은 편하게 결과를 알았다. 사실 4월 중순 정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당일이 가까워오니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객관식 점수를 기반으로 시험에 대한 내 감으로 보았을 때 크게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사실 도저히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다행히 이로써 다시는 이런 시험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이를 위해서 떨어가며 공부할 일도 없어졌다. 


안도감. 


제일 크게 느낀 감정은 역시 안도감. 


발표 후 만난 친구 하나는 지금의 감정이 마치 난파선에서 구조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적절한 비유였다. 합격의 기쁨이라기보다는 다행히 나는 바다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생존자 명단에 누락되어 있는 이름들을 보며 마냥 즐거워만 할 수는 없는 양가적 감정. 동시에 나는 아직 여전히 백수고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들이 많이 남았다는 데서 오는 어떤 후련하지만은 않음 감정까지. 복합적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감정들의 한켠으로 후련함도 느끼건만 결국 기쁨과 설렘보다는 아직은 안도감과 이 뒤의 일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이 지배적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기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있다. 이제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는 크게 의미가 없는 세상. 이것 하나로 인정 받고 보상 받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가지고 싶지 않았고, 어제와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데 이것 하나로 조금이라도 우쭐한 마음이 들고 싶지도 않다. 마음 한켠으로 그래도 참 잘 버텨내었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뿌듯함은 어쩔 수 없이 들지만 말이다. 주변에서도 오래된 친구들일 수록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고, 동시에 자식 둘이 변호사가 되어 기쁘신 부모님의 마음도 다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어쩌면 로마 개선 장군의 귓속에 노예가 속삭여 주었다던 memento mori 처럼 겸손해지라고 다그쳐주는 말들이 더 반가웠을 것도 같다. 그 자체로는 종이 한장의 증명서에 지나지 않는 시험 합격. 이제 겨우 시작하는 발걸음에 지나친 축하는 어울리지 않는다.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살 것인지 큰 물음들은 여전히 답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좋긴 좋다. 이렇게 마음이 편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요새는 한강에서 자전거도 타고, 약간의 알바로 벌어놓은 돈으로 소소한 사치도 하고, 그렇게 있다. 욕심을 조금 더 내어서 못 읽던 책도 읽고, 해보고 싶었으나 기화가 닿지 않았던 공부도 했더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리 부지런한 의지의 인간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로스쿨 3학년, 6월 모의고사가 끝나고는 섬에 갔다가 태풍에 갇혔었고, 8월 모의고사가 끝나고는 유학가는 친구 마지막 배웅 차 제주도에 1박2일로 다녀왔다. 이 모든 것이 시험 떨어지면 너무 속없는 일이 되는 것 같아서 무서웠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나는 그 일들을 후회하지 않고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발표 당일 점심에는 혹시라도 떨어지면 좋은 일들은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전날 저녁에 간단히 재료들을 준비해서 엄마와 동생에게 점심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와 양고기를 차렸는데 이 역시 쓸데없는 일이나 한 것은 아니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그 고생스러움을 다시 겪어야 하는 동기들에게는 힘내라는 말 뿐이다.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차가운 동굴로 스스로 들어가야만 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다들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주위에서 도와준다 하여도 오직 혼자만 감당해야할 그 무게를 온전히 버틸 수 있기를. 난파선에서 살아나온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운이 허락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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