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길을 찾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다. 학부 재학 중 수업 및 외부활동을 통해 이를 접하게 되었었고,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무한한 경제성장에 대한 추구가 지속가능하지 않음이 자명하기 때문에 누구도 이 문제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었지만 기후변화라는 주제 자체는 그보다 넓은 함의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전지구적으로 우리 모두가 직면한 공동의 ‘존재론적’ 위기라고 생각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좋은’ 성장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 의식으로부터 그와 같은 논의는 결코 촉발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그러한 논의에 대한 시도는 결코 주류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지 못하였다. 계속되는 성장을 전제한, 성장 속에서만 안정을 구가하는 체계 내에서 지금과 같은 성장이 어떠한 방향으로든 변화해야 한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에너지 전환, 효율성 증진 등의 분야에서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 기후변화 담론은 마치 없었던 것과 같이 되었다.
여전히 내게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흥미롭다.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해로운 요소를 조금은 줄여 나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가질 수 있었던 사회적 함의는 희석되어 이미 버렸다. 지금과 같은 성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친환경’은 사회적 차원에서 별달리 새롭게 제시하는 논점이 없다. 성장을 통하여만 구현되는 경제적 안정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사회적 구성원의 문제는 기후변화 담론에 포섭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그와 같은 문제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과라도 낸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재론적 위기’ 만큼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쉬운 일이다. 억지로라도, 다소의 고통을 감수하고 변화를 시도해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 금융위기와 금년도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아마도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 경제에 대한 두려움만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의 둔화가 가져오는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기에 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구조적 차원에서 변화를 촉발할 하나의 담론의 추구는 처음부터 효용성이 없거나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담론’이라는 개념을 끌어온 것 자체가 낡은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열려있는 행위의 가능성은 미시적 차원에서 개별적 문제의 해결일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있다. 나는 여전히 추상화해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원래부터 나는 행동하는 인간은 아니었지 않은가. 다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따름이다.
나는 지금, 백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할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