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똑똑함을 제게 강조하여 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문 업무를 하다보면 의뢰인이 기업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업이 아무리 '법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스스로 자아가 있는 사람(자연인)은 아니므로 결국은 기업의 법무팀 또는 실무자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며 일하게 된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자문업 역시 마지막 단에서는 사람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자문업 역시 여타의 서비스업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어느 정도 의뢰인(의 실무담당자)의 성향에 따라 그 소통의 즐거움 (또는 고통)이 정하여지기 마련인데, 가끔 가장 업무하기 까다로운 상대는 실무과 관련 규정에 적당히 능통한 실무자이다.
여기서 '적당히'라는 수식어가 상당히 중요한데, 아예 전문가급으로 능통한 상대방은 오히려 내가 배울점이 많거나 소통비용이 확 줄어드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적당히' 아는 실무자가 상대 담당자인 경우에는 아예 잘 모르는 상대방에 비하여 소통비용이 확 증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략적으로 개념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으나 그 세부적인 뉘앙스를 분별할 정도의 깊이는 갖추지 않은 경우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고유한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때에는 전달드린 의견에 대한 질문사항은 많아지는데 그게 핵심을 짚기 보다는 지엽적인 부분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또 세부적인 내용에서 오해를 하고 있으신 경우도 많은데, 그에 대하여 설명을 함에 있어서도 구구절절 어떤 포인트에서 왜 오해를 하고 계신지 풀어서 (정중하게) 말씀드려야 하므로 어려운 점들이 있다.
상대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시는 경우에는 결론만 전달하면 되고, 아주 전문가급인 경우에는 내가 개략적 근거와 방향만 언급드려도 바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적당히' 아는 상대방에게는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배경부터 결론에 이르는 근거까지가 일일이 상세히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소통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모든 건에 대하여 배경부터 결론에 이르는 근거까지 상세히 설명하면 좋지만,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에까지 일일이 답변을 드리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를 실무자의 '센스'로 판단해 주어야 하는데 '적당히' 아는 분일수록 그런 판단을 해주시는 경우는 적다.
특히, 자신의 학력과 배경과 학습능력과 업무 경력에 대한 자부심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해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느끼는 분들이 이런 경향을 자주 보여주시는데, 이런 때에는 단지 업무적 솔루션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능력의 우수함을 뽐내는 것이 중요 포인트기 때문에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드리지 않는 한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문을 제공하는 변호사의 시간은 유한하고, 중요한 포인트를 벗어난 부분에 대하여 특정한 개인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추가적인 시간을 들이는 것은, 그에 대하여 내가 시간당 비용을 청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생산적이지 않고 다르게 유의미하게 (다른 질의사항 또는 다른 의뢰인을 위하여) 투입되었을 수 있는 시간을 그에 소모하는 것이므로, 결코 즐겁지 아니하다.
물론 서비스직이니 만큼 이를 내가 피할 수는 없고, 따라서 최대한 응할 수 밖에 없으나, 다만 정도를 벗어나지는 않도록 관리 정도를 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짜증을 낸다거나 하는 건 더욱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아니라서 가끔은 잠깐 숨 고르기를 해야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약간 숨고르기를 하였다. 복에 겨워 해보는 푸념.
오늘의 일기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