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사회의 단층선(faultline)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극’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인데, 그런 그가 ‘기생충‘에서 반지하라는 공간으로써 ‘빈’을 형상화 한 것은 선진국 반열에 들었고 글로벌화 되었다는 한국(사실 ‘서울‘)과 그 안에서 여전히 저개발국가 수준의 인프라만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을 대조하여 보여주기 너무 좋은 장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의 작품에서의 반지하는 서울 바닥의 온갖 오물을 흡쓸고 쏟아진 물줄기를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던 가족이 가진 것도 없는데 그마저도 지킬 수 없었음을 처절하게 보여준 공간이었다면
현실에서의 반지하는 갑작스런 폭우에 공간 자체가 그 안에 터잡아 살던 사람들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곳이었다.
이번 폭우에 따른 피해를 서울시의 재난재해 대비의 부족이나 그간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소홀에 의한 것으로 서둘러 결론 내리는 것은 아마도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쏟아진 폭우의 양 자체가 기록적인 것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는 그런 일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아프게 인지하게 되었다.
불평등의 적극적 교정은 그 자체로서 어려운 과제일 뿐 아니라, 손쉽게 할 수 있는 선택도 아니다. 누군가는 그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고, 누군가는 그것이 잘 설계되지 않으면 결국 전체 효율을 낮추어 모두에게 나쁜 선택이 된다고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우리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현대 사회에서 불평등의 원인에 대하여 적합한 분석을 하거나 마찬가지로 단순할 수 없는 해법에 대해서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또 우리의 선의가 더 나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지하에 살아야 하고, 누군가는 그 반지하에서 차오르는 물에 목숨을 잃어야 하는 현실을, 아무리 예외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일들이 되도록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쟁도 하고 자본도 축적하고 아웅다웅하면서도 같이 살아가는 것이고 결국 이런 것들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해결하여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성장’을 한다는 말인가. 물론, 나는 우리가 이룬 성과들로써 서울이 대체적으로 그러한 재난재해로부터 과거에 비해서는 보다 안전해진 곳임은 여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나는 오늘도 글로 감상을 푸는 것 외에 이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나갈 것이다.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