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표가 봤다면
"그대가 소식을 전하고 오라!"
전국(戰國, B.C.403 -221) 초기 위(魏) 나라의 관리였던 서문표(西門豹, 생몰년 미상)는 업(鄴) 땅에 부임하면서 그곳의 악습인 인신공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매년 물의 신 하백(河伯)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습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고 이주하는 사람도 늘어 미곡 생산량이 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신공양과 관련한 관리들의 타락도 문제였다. 돈 있는 집 처녀는 뇌물을 받고 인신공양에서 면제시켰기 때문이다. 하백에게 인신공양을 하는 날, 서문표는 대상자로 뽑힌 처녀를 보더니 얼굴이 못생겼다며 타박을 했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늙은 무당에게 하백을 만나 좀 더 나은 처녀를 데려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하라며 사람을 시켜 그를 물속에 처넣었다. 얼마 뒤 서문표는 왜 이리 소식이 늦냐며 젊은 무당을 시켜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 오라고 시켰다. 그 또한 물속에 처넣은 것. 이런 행태를 두세 번 더 한 뒤 이번엔 마을의 장로(長老)라는 이들을 불러 같은 말을 하고 그들 또한 물속에 처넣었다. 마지막으로 그간 뇌물을 받아먹던 관리들을 향해 일갈하며 그들 또한 물속에 처넣으려 하자 관리들이 피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찧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이후 업 땅에는 인신 공양 풍습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관리의 부정부패도 일소됐고, 떠났던 이들도 되돌아왔다. 서문표는 인신공양을 하던 그 물을 대대적으로 다스려 비약적으로 미곡 생산량을 늘렸다.
서문표의 일화는 그 한 사람만의 일화가 아닌 당시 사류 계층의 인식을 대변하는 일화이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신비/미신을 타파한 인문 정신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개명한 지금도 신비/미신이 횡행하는데 이천 수백 년 전에 이를 타파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아시아 문명에서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인격신은 이미 이천 수백 년 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면 기풍(氣風)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우리 근대사의 천주교 박해 사건은 분명 비극적인 일이지만 동아시아의 인문 정신에서 보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른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무리를 처단한 것이니까 말이다. 서문표는 일찍이 그런 실행의 전범을 남겼던 사람이다.
사진은 보령댐 근처에 있는 서짓골 성지(聖地)의 순교자 현양비이다. 한자는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이라고 읽는다. 흔히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고 의역하는데, 직역하면 '영광되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이다. 서짓골 성지는 병인박해(1866) 때 희생됐던 4명의 순교자가 15년 6개월 동안 묻혔던 장소이다(현재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 현양비를 보며 문득 다른 각도에서 현양비를 볼 수는 없을까 싶어 몇 마디 해봤다.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해 죽은 이는 그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일이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본 것이다.
榮과 致가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榮은 木(나무 목)과 熒(등불 형) 약자의 합자이다. 오동나무란 뜻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熒의 약자는 음(형→영)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오동나무는 자주 혹은 붉은색이 감도는데 그 색이 등불 빛과 흡사하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오동나무 영. 지금은 빛나다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빛날 영. 榮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榮華(영화), 榮枯盛衰(영고성쇠) 등을 들 수 있겠다.
致는 夂(뒤져올 치)와 至(이를 지)의 합자이다. 이르다란 뜻이다. 夂로 뜻을 표현했다. 夂에는 뒤쳐져 오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늦지만 계속 나아가 목표 지점에 '이르렀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至는 음(지→치)을 담당한다. 이루다 · 다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모두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致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致命傷(치명상), 致死(치사) 등을 들 수 있겠다.
사상과 신념을 달리한다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비록 서문표의 행위가 인문주의의 승리이긴 하지만 상찬(賞讚) 받을 일은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단은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공경하되 멀리하는 태도를 취하라고 권했다. 자신의 가치관을 상대에게 강요하여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그것이 혹세무민의 사상이나 신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