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인형 전시회 홍보
나는 마침내 비굴한 사내가 되었다. 간밤에 보아 두었던 넘어진 코스모스 몇 그루를 아침 일찍 일어나 뽑고, 뽑은 흔적이 남지 않게 단도리를 했다. 아내가 알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뭐라 타박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굴을 찡그린다고 해서 화난 얼굴이 아니고 타박을 한다고 해서 육두문자를 쓰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그 자체를 마주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아니 천하의(?) 김 아무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오호, 통재라!
아내는 자칭 자연주의자요 생명 예찬론자이다. 잔디밭에 난 풀들도 조심스럽게 뽑고 어쩌다 잔디밭에 이런저런 풀꽃이 나면 절대로 뽑지 않는다. 그래서 봄철 잔디밭에는 양귀비와 뽀리뱅이가 지천까지는 아니라 해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피어있고, 여름철에는 나팔꽃이, 가을철에는 코스모스가 산개해있다. 잔디밭은 잔디밭이고 화초 밭은 화초 밭이어야 하는 내게 잔디밭인지 화초 밭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이런 정경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쩌다 뽑을라치면 예의 저 고상한(?) 표현으로 제어한다. 그리고 그 제어의 배경은 자연주의요 생명 예찬론이다.
막무가내로 내 생각을 관철시킬 수도 있겠지만 필경 적지 않은 후유증이 있을 터이고, 또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해결 방법은 적당히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것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아내의 눈을 속이며 나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 넘어진 코스모스를 이른 아침에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넘어진 코스모스는 넘어진 그대로 운치가 있다며 절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생명력이 강해 넘어지면 넘어진 그 줄기에서 뿌리가 생기기에, 인위적으로 처리하지 않는 한, 죽는 일이 없다. 아내는 그렇게 산만해진 코스모스를 그것대로 보기 좋다고 처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비굴한 방법을 통해 올해 잔디밭은 비교적 양귀비와 뽀리뱅이의 숫자가 줄었고 코스모스의 숫자도 줄었다. 한 번은 아내가 양귀비와 뽀리뱅이 코스모스가 작년만 같지 못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기상 이변 때문이 아니겠냐고 둘러댔다. 아내는 수긍하지 않으며 나의 진솔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끝까지 모른척했다.
아내가 인형 전시회를 연다. 아내는 몸이 안 좋아 직장을 그만두고 취미 겸 소일 삼아 인형을 만들게 되었다. 전직 미술 교사인 데다 손재주가 있어 인형 만드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햇수로 5년이 되어 작품 수가 제법 많아지자 지도해주시는 분이 개인 전시회를 열어보라고 권유했다. 합동전은 몇 번 참여했지만 개인전은 자신이 없었는지 망설였다. 그런데 이번에 아내의 지인이 장소를 제공하겠다며 적극 권유하자 용기를 내어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아내의 인형들은 아내의 성향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온기가 있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은 저절로 그가 행하는 일과 작품에 배어들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아내의 인형들이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온기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재도 그러하다. 빨래 너는 아낙네, 새참 내러 가는 아낙네와 단발머리 여자 아이, 매기 할멈, 잠자리 잡는 사내아이…. 이따금 서구적 소재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빨간 머리 앤, 캔디’ 등 정감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주로 사용한다.
아내가 전시회를 열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형 제작 과정을 통해 얻은 마음의 치유와 행복감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내는 잔걱정이 많은데, 인형을 만드는 동안 아무런 잡념이 안 생겨 정말 좋다고 말한다. 잡념이 멈춘 곳엔 마음의 여백이 생기고, 마음의 여백은 행복감과 연결된다. 아내는 자신의 인형을 통해 이런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공유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아내는 자연주의자와 생명 예찬론자에 보태 범신론자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아내와 성향이 거의 정반대이다. 젊은 날에는 나의 성향을 고집하고 나의 성향을 따르지 않는(못하는) 아내를 많이 타박하며 ‘왜 저럴까?’를 되뇌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대로 생각해보았다. 아내도, 내색은 않지만, 나를 보며 ‘왜 저럴까?’를 되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 생각 이후로 나는 아내에 대한 타박을 멈췄다(나이 먹어가며 기운이 떨어진 탓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아내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비굴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마침내 비굴한 사내가 되었다. 아내의 전시회를 이렇듯 너절한 이야기를 하면서 홍보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가 나에게 홍보를 부탁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비굴한 사내가 되었다.
*새물내: 햇빛에 잘 마른 빨래에서 나는 냄새라는 뜻이다. 아내의 중학교 제자가 아내에게 지어준 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