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도보 국토 종단기(제14화)
4월 12일 수요일
달콤한 여왕님의 품속에서 잠이 깬 것은 아침 5시. 다시 여왕님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위선적인 청정 선비의 자세로 돌아와 과감히 품속을 뿌리치고 빠져나왔다. 너무 과감히 빠져나오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앱을 켜고 연풍면까지의 거리를 눌러보니 37km에 도보로 10시간 6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숙박지는 어디로? 온천 모텔과 스토리 모텔이 있다. 오잉? 면 단위에서는 있기 어려운 모텔인데? 문경새재가 유명 관광지라 있는 건가? 어쨌거나 잘됐다! (잘 되기는! ‘신기루’ 모텔이었다). 청정 선비의 자세로 돌아왔지만, 달콤한 품속 여운을 잊을 수 없어, 달콤한 식사로 여운을 달랬다.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 날씨를 잠깐 확인하니 주말까지 황사가 심하단다. 마스크를 쓰고 걸어야 하나? 여타 아침 제 의식을 마치고 모텔 밖에 서니, 6시. 자, 연풍을 향하야 출발~!
문경시 불정길을 지난다. 도로 아래 재미있는 이름이 눈에 띈다. 도토리 방앗간. 우리들 식품이란 이름이 덧붙어 있는 걸 보니, 가공식품 상호 같다. 도토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듯. 도토리란 이름도 방앗간이란 이름도 정겹다. 도토리 세 알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랴… 어릴 적 불렀던 노래와 익숙한 속담 때문일 터. 작명을 잘한 것 같다. 그나저나 예전엔 도토리묵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는데, 요즘에 먹는 도토리묵은 왜 그리 밍밍한 것인지? 너무 쉽게 먹을 수 있게 돼서 그런 건가, 내 입맛이 변한 건가?
새재란 선입견 때문인지 마주치는 산들의 위용이 그간 지나오며 본 산들의 위용에 비해 한결 더 위엄 있게 다가온다. 사진 한 장 찰칵!
오미자 테마 터널이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모처럼만에 관광을 한 번? 입장료를 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소가 아니고 사설 업체에서 운영하는 관광소이다. 옛 철도 터널을 오미자 테마 터널로 바꿔 놓은 것인데, 감성이 무뎌서 그런가, 왜 오미자 테마 터널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 있구나! 음료를 파는데 음료의 주재료가 오미자였다! 손님이 나 혼자였는데, 이른 시각부터 판매대를 지키는 분들이 안쓰러워 팩 음료 2개를 샀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휙 한 번 둘러보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11시가 돼간다. '진남 휴게소'라는 데가 눈에 띈다. 휴게소 음식은 별론데… 그래도 누룽지보다는 나을 터. 딱 좋은 점심 타임이라 망설이지 않고 휴게소 문을 열었다. 아, 이게 웬 별천지냐? 휴게소, 하면 그려지는 그렇고 그런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장식이 번뜩이는 도심 한복판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내가 혹시 잘못 들어왔나? 문을 열고 나와 다시 간판을 보니 분명히 진남 휴게소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식당과 쇼핑을 겸한 휴게소인데, 장식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그나저나 내겐 점심만이 중요할 뿐. 식당 쪽에 가서 메뉴를 보니, 돌솥밥이 눈에 띈다. 만 원. 무난하다.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판매 데스크 저쪽에 식혜를 비치해 놓았다. 오메, 내가 좋아하는 거. 직접 담갔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문구가 붙어있고, 많이는 드시지 말란다. 이건, 맛있다는 반증.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내가 들어섰을 때 한 분이 식사하고 있었고, 뒤이어 연세 든 노부부가 들어왔다)… 살살 눈치를 봐가며 3잔을 먹었다. 자랑과 당부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점심다운 점심을 먹고(밥도 맛있었다) 휴게소를 나왔다. 나오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감동스러워서!
씨름 연습장으로 변한 초등학교 폐교를 지난다.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그 애들이 들려주는 온갖 사연을 들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느티나무 잎 사이로 비치는 하얀 햇살, 괜시리 마음을 더 먹먹하게 만든다. 이제 폐교의 아픈 사연은 그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황사가 심하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날 때만 해도 몰랐는데 노변의 하얀 배꽃들 색이 바래 보일 정도다. 마스크를 써야 하나? 한동안 쓰고 걷다가 답답해서 벗어 버렸다. 코털도 있고 허파 꽈리도 있는데, 걸러지겄지! 야잇, 중국 놈들아, 대국 위세만 부리지 말고, 아름다운 덕으로 감화 좀 시켜봐라! 도대체 니덜도 힘들다매 왜 이리 황사 문제를 해결 못 하는 거냐! 무슨 무슨 타령들 하더만서도 내 보기엔 니덜 의지 문제 같다. 니들 황사 문제 해결하면 내 애정 보너스 점수 1점 더 준다! 알아들었지?
문경새재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관문이 보인다. 글씨를 보니 박 대통령 글씨 같다(확인은 안 했지만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예전엔 저분 글씨를 여기저기서 봤는데, 지금은 드물게 본다. 90년대 만화 연수를 받으러 서울 남산에 간 적이 있는데, 흉물스럽게 가려진 박 대통령의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이 또한 세상만사 새옹지마로구나. 한때는 무슨 보석인 양 취급되던 것이 이제는 똥통의 휴지 조각 같은 대접을 받으니. 그나저나 남도 그렇고 북도 그렇고 그 위대한 지도자들의 글씨 때문에 금수강산은 만신창이 아닌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통일된다면 골칫거리들일 것 같다. 병영사회를 구현했던 지도자들의 기념물이라고 그대로 놔두려나?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관문을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나는 이화령 쪽으로 간다.
자전거 도로가 있어 걷기에 편하다. 그런데 관리가 안 된 듯 자전거 휴게소가 중간중간 있는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데크가 썩어있어 잘못 디뎠다간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졸속 행정 과시 행정의 슬픈 장면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무리한 4대 강 사업에 아편 주사 격으로 만든 자전거 도로. 밀어붙였던 자 물러나고 감방 가니, 내가 언제 저 사업에 참여했냐고 시치미 뚝 떼는 지방 행정의 두꺼운 민낯을 본다. 허기사 억지로 참여했으니 뭔 의욕이 있어 사후 관리를 허겄어?
모닝 차 한 대가 앞에 서 있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내리더니 사진을 찍는다. 음심이 발동해 수작을 부렸다. “찍어 드릴까요?” 셀카를 찍는 것보다 누가 찍어주는 게 더 온전한 사진이 되기에 친절을 가장하여 음심을 발동시킨 것이다. “아녜요!” 샐쭉 대답하고 바로 차를 타고 이동한다. 오매, 창피한 거~. 부끄부끄. 그런데 얼마를 올라갔을까, 아까 만났던 그 아가씨가 또 사진을 찍는다.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이 아가씨, 뒤에서 사진 찍기를 마쳤는지 다시 차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이러기를 3번 더했다. 그런데 의외로 내 걸음이 빨랐는지 이 아가씨가 늦장을 부렸는지 아가씨가 차를 세운 지 얼마 안 돼 바로바로 내가 따라잡았다. 원치 않은 스토커가 된 셈. 애라, 기왕에 버린 몸, 용기를 내어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연구를 하시나요?” 셀카를 찍는 게 아니고 도로 주변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녜요. 도로 관리 때문에 찍는 거예요. 걸음이 무척 빠르시네요?” 한다. “뭐….” “어디 가세요?” “연풍 갑니다~” “아….” 헤어지고 다시 걷는데, 차는 이제 방향 반대로 내려간다. 문경의 공무원이었던 것 같다. 연풍은 충북 지역. 이화령 이전(以前) 지역의 도로 형편을 알기 위해 잠시 현장 출장을 나왔던 모양이다. 아까 오면서 봤던 그 형편 무인지경의 자전거 도로 휴게소 사진도 찍었을까? 부디 찍었기를! 조금 더 수작을 부릴 수 있었는데… 살짝 아쉬운 마음을 담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하여간, 이 자가… 정신 차렷!
이화령 통과 터널이 보인다. 웅장하다. 터널을 지나기 전 올라온 경북(문경) 쪽 사진을 찍고, 터널을 지나 저 아래 보이는 충북(괴산) 쪽 사진을 찍었다. 경북 쪽은 황사가 덜한데 충북 쪽은 황사가 몹시 심했다. 뭐여, 황사, 너도 지역 차별하는 겨! 그럼, 못 써!
이화령 휴게소에서 비싼 자판기 캔 음료(보통 1천 원인데, 1천5백 원이었다. 큰 액수엔 둔감하고 작은 액수에만 민감하다. 찌질해서 어쩔 수 없다)를 한 잔 들이켜고 이화령 하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어 걷기 편했다. 난생처음으로 명박 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굴곡진 이화령 고개를 마음 편하게 내려와 드디어 연풍에 도착, 면내에 잠시 들려 간식거리를 사고, 목표했던 숙소로 향했다. 온천 모텔과 스토리 모텔 두 개가 있었는데, 왠지 스토리 모텔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보편적으로 구식 이름을 쓰는 곳보다 알 수 없는 야리꾸리한 외래 이름을 쓰는 곳이 시설이 더 낫기 때문이다. 아, 이 국어를 사랑하지 않는 자여, 그대 이름은 ㅇㅇ이로다!
연풍면 소재지에서 물경(!) 50분을 걸어 도착한 스토리 모텔!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모텔 앞에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건축 자재 같은 것도 널브러져 있다. 폐업!! 온천 모텔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이도 폐업!! 어쩌자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연풍면 소재지로 향했다. 그런데, 나 같은 어벙한 자가 또 있었다. 아까 이곳으로 올 때 자전거 여행자인 듯한 사람이 지나갔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내가 한참 이곳으로 가고 있을 때 다시 나를 지나쳐 연풍면 쪽으로 갔던 것. 필경 나 같은 낭패를 봤을 것이다. 사람, 참, 같은 여행자끼리 친절 좀 베풀어 주지. 시간상으로 봤을 때 내가 숙소를 찾으러 가는 것으로 보였을 텐데…. 애라, 이 ×아, 가다가 빵구나 나라! 애맨 사람에게 괜스레 화풀이를 했다.
연풍면 소재지엔 숙소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새재 파크. 후기 평이 안 좋아 ‘스토리’를 찾아갔던 건데 이젠 별수 없이 고개를 납작 숙이고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4만 원을 달란다. 현금 운운하며 트라이를 하려다, 그만두고 얼른 값을 치른 뒤 방으로 들어갔다. 5만 원 아니 6만 원을 달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지 않은가. 아, 나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ㅇㅇ이로다! ‘파크’라는 말이 무색하다. 심하게 말하면 여인숙 수준이다. 그러나 역시 있을 건 다 있다. 샤워를 한 뒤 이하 모든 저녁 제반 의식을 치른 뒤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아무래도 코털과 허파 꽈리 기능이 시원찮은가 보다. 샤워를 했음에도 뭔가 매캐한 느낌이 속에서 올라온다. 그놈의 황사. 예의 또 부질없이 TV를 켜고 이 채널 저 채널을 돌리다 그냥 꺼버렸다. 야들아, 제발 좀 재미난 것 좀 올리고 보라고 강요하렴! 옆 방에서 약간 다투는 듯한 소리가 난다. 나처럼 어벙한 서방 때문에 형편 무인지경의 모텔에 들어와 화가 난 마누라가 투정을 부리고 덩달아 짜증 난 남정네가 뭐라고 하는 듯싶다. 화해들 하셔, 그래도 댁들은 둘이 왔잖여, 나는 혼자라고~! 잘 들 주무시소. 불을 끄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은 제천까지 간다. 제천, 아버지가 생전에 주말마다 출타했다 돌아오셨을 때, 어디 갔다 오셨냐고 여쭈면 가장 많이 언급하셨던 고을! 과연 제천엔 무엇이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