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의 '포사자설(捕蛇者說)' 한 대목.
숨어서 남의 실수를 찾아내고 은근 까면서 쾌감을 즐기는 건 소인이 좋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 군자는 많지 않고 소인이 많으니, 그런 재미를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고문진보' 번역을 끝내고 기존 번역본과 대조하다 기존 번역본의, 내가 보기에, 실수로 보이는 구절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기존 번역본이 다 실력 있고 명망 있는 분들이 펴낸 것이라 그 쾌감이 한층 더했다.
내게, 이 무더운 날씨 어떤 청량제보다도 시원한 쾌감을 준 구절을 소개한다(사진). 밑줄 부분의 대의는 독사를 잡아 진상하는 사내가 주변의 이웃들이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 고향을 떠나거나 죽었다는 사연을 말한 대목이다.
성백효 씨 번역은 이렇다: "지난번에 우리 할아버지와 더불어 거주하던 자들은 지금 그 집이 열 가호 중에 한 가호도 없고,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거주하던 자들은 지금 그 집이 열 가호 중에 두세 가호도 없으며, 나와 더불어 12년 동안 거주한 자들은 지금 그 집이 열 가호 중에 네댓 가호도 없으니, 이는 죽지 않으면 이사 간 것입니다."
이상하 외 5인이 펴낸 번역본의 번역은 이렇다: "전에 우리 할아버지와 더불어 살던 자들은 지금 열에 한 집도 없고,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살던 자들은 지금 열에 두세 집도 없고, 나와 더불어 12년 동안 살던 자들은 지금 열에 네댓 집도 없으니, 죽지 않았으면 이사를 갔습니다."
신용호 씨 번역은 이렇다: "지난날 제 조부와 같이 살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 남은 집이 열에 하나도 되지 않고, 제 부친과 같이 살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 그 집에 열에 두서너 집도 남지 않았으며, 저와 함께 12년 동안 살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 그 집이 열에 네댓 집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죽지 않았으면 집에서 쫓겨나 떠돌게 된 것인데..."
얼핏 보면 '뭐가 문제란 겨?'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세밀히 보면 내용이 이상하다. 같이 살던 이들의 가구 수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 '남은 집이 열에 한 집도 없고, 열에 두세 집도 없고, 열에 네댓 집도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큰 뜻으로 보면 함께 거주했던 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인 것은 알겠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의미가 불분명하다.
'열에 한 집도 없다'는 것은 한 집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고, '열에 두세 집도 없다'는 것은 한 집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고, '열에 네댓 집도 없다'는 것은 세 집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한 집도 없거나 한 집 정도 밖에 없거나 세 집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굳이 이렇게 역산해서 이해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 집'이나 '두세 집'이나 '네댓 집'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 의미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이 부분의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이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는 열에 한 집 밖에 없고, 우리 아버지와 함께 살던 이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는 열에 두세 집 밖에 없으며, 나와 함께 살던 이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는 열에 네다섯 집 밖에 없으나, 그나마 죽거나 다 고향을 떠났습니다." 의미가 한결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그런데 내 번역에 대한 확신감이 들지 않던 차 도서관에서 우연히 성백효 씨의 개정판 번역을 발견해 해당 대목을 찾아보니, 내가 번역한 것처럼 번역해 놓은 것을 보게 됐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우하하!
다른 번역도 그렇지만 한문 고전 번역 역시 힘들다. 어쩌면 한문 고전 번역은 내용을 옮기는 데서 오는 어려움보다도 보아주는 이가 없는데서 느끼는 고독감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응원 없는 경기를 뛰는 운동선수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하여, 보아주는 이 없으니, 자칫하면 소홀하게 번역하기가 쉽다. 그러나 번역하는 자신만은 자신이 제대로 한 건지 그렇지 않은지 잘 안다. 아마 위 구절을 번역한 역자들도, 내가 생각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넘겨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한문 고전 번역은 자기 양심과의 싸움이란 생각이 든다(너무 막 나간 것 같다. 하하).
남의 뒤통수를 까면서 은근 쾌감을 느끼고 내가 더 잘난 것 같다는 전형적인 소인의 즐거움을 맛봤다("너, 광장에 나와서 한 번 대결해 봐!"라는 소리가 들린다. 언감생심, 내가 왜 광장에 나가? 싫어! 뒤에서 은근 지적질이나 하면서 쾌감을 느낄 텨!).
앞의 번역본은 좋은 번역본이다. 한 두 군데 흠이 있다고 내침을 당할 그런 책이 결코 아니다. 나 같은 소인의 지적질을 당할수록 이 책의 가치는 외려 더 올라갈 것이다. 덤비는 놈이 있다는 건 그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의 반증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