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도 보아야

부선(傅選)의「필명(筆銘))

by 찔레꽃
pimg_7232191432406397.png 부선(傅選)의「필명(筆銘))


"오늘의 이 영광을 같이 고생한 모든 스텝들에게 돌리겠습니다."


영화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들이 흔하게 하는 감사말 중 하나이다. 겸손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공을 애써 타인에게 돌리니 겸손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빛나는 주연을 만들기 위해 그늘 속에서 일한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사실일 수도 있잖겠는가? 주목받는 이들이 자신 뒤에 가려진 이들을 기억해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자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사진의 한문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석재상고 결승이치 강급후재 역이서계 (서계)지흥 (흥)자힐황 조체일체 침수번창 미륜군사 통원달유 수훈기전 비필미수(昔在上古 結繩而治 降及後載 易以書契 (書契)之興 (興)自頡皇 肇逮一體 浸遂繁昌 彌綸群事 通遠達幽 垂訓紀典 非筆靡修)


아득한 옛날엔 매듭을 지어 의사를 표현했다. 후대에 이르러 서계(초기 문자)로 대체되었다. 서계는 창힐이 처음 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했고 양도 적었지만 갈수록 복잡하고 양도 많아졌다. 덕분에 많은 일들을 두루 적고 멀고 외진 곳까지도 의사를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삶의 교훈과 중대한 사실들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려면 그것(문자)을 적는 붓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문자의 기원과 탄생 그리고 그것이 이룩한 성과를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문명의 핵은 문자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 그런데 이 글의 핵심은 문자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그 문자를 실어 나르는 도구인 붓에 대한 찬양이다. 문명의 핵인 문자의 공을 치켜 세운 것은 붓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배경일뿐이다. 주연도 훌륭하지만 그 주연을 있게 한 스텝들의 공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아니 어쩌면 스텝들이 있었기에 주연도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은 당대(唐代) 구양순 등이 편집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예문유취(藝文類聚)』「필(筆)」편에 나오는 것이다. 『예문유취』는 해당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연원과 그에 관련된 역대 시문들을 수록해 놓고 있는데, 이 글은 붓에 관한 시문 중 하나이다(위(魏)나라 부선(傅選)의「필명(筆銘)). 붓의 의미와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는 시문이라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중국의 4대 발명품을 화약, 종이, 나침판, 인쇄술이라고 하는데 이 시문의 저자가 이 말을 들으면 왜 붓을 빼놓았냐고 항의할 것 같다.


사진은 모 대학 도서관에 들렸다 찍은 것이다. 책과 문자 그리고 그것을 실어 나른 필기구에 대한 의미를 사색해 보라는 의미에서 써놓은 것 같았다(더불어 그 미래도). 위에서, 이 글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보았지만 이 액자를 건 의도는 방금 말한 것이 맞을 것이다. 도서관에 잘 어울리는 액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한쪽에 해설표를 붙여놓으면 좋겠다 싶었다.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繩은 糸(실 사)와 黽(蠅의 약자, 파리 승)의 합자이다. 끈(줄)이란 의미이다. 糸로 뜻을, 黽으로 음을 나타냈다. 끈(줄) 승. 繩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繩度(승도, 규칙이나 법도), 繩墨(승묵, 먹줄) 등을 들 수 있겠다.


契는 大(큰 대)와 丰刀(약속할 기)의 합자이다. 상호 간에 맺은 중대한 약속이란 의미이다. 맺을(약속) 계. 契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契約(계약), 契員(계원) 등을 들 수 있겠다.


肇는 본래 肈로 표기했다. 시작하다란 의미이다. 시작할 때는 분발해야 하기에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는 의미의 戈(창 과)로 뜻을 표현했다. 나머지는 음을 담당한다. 비롯할 조. 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肇國(조국, 건국), 肇春(조춘, 이른 봄. 早春과 통용) 등을 들 수 있겠다.


繁은 말 갈귀 장식이란 의미이다. 糸(실 사)로 의미를 표현했다. 나머지는 음(번)을 담당한다. 지금은 주로 번거롭다(번성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번거로울(번성할) 번. 繁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頻繁(빈번), 繁盛(번성) 등을 들 수 있겠다.


綸은 糸(실 사)와 侖(생각할 륜)의 합자이다. 관리들이 허리에 두르던 끈을 의미한다. 糸로 의미를 표현했다. 侖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끈을 제작할 적에는 정밀하게 사고하듯 일정한 순서를 지켜 꼬아야 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허리끈 관. 지금은 주로 통괄하다란 의미를 담은 벼리(그물코)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벼리 륜. 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綸音(윤음, 임금의 말), 綸命(윤명, 임금의 명령) 등을 들 수 있겠다.


靡는 非(아닐 비)와 麻(삼 마)의 합자이다. 분산하여 흩어지다란 의미이다. 분산하여 흩어지면 본모습과 달라지기에 非로 의미를 표현했다. 麻는 음(마→미)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가느다란 삼실처럼 분산하여 흩어진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지금은 '없다'로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없을 미. 靡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靡寧(미령, 병이 있어 몸이 편하지 못함), 靡他(미타, 다른 것이 없음. 無他와 통용)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붓은 진(秦) 나라의 몽염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발명했다고 보기보다는 개량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주목받는 문명의 이기들은 대개 기존의 토대 위에 가감한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이 의견이 타당성 있어 보인다. 한문 원문에 괄호 친 것이 있는데, 글씨를 쓴 분이 빼놓고 쓴 부분이라 보충해 넣은 것이다. 괄호의 내용이 없으면 문맥이 통하지 않아 보충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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